윤석열 총장의 중대범죄수사청을 막을 수만 있다면 직위를 100번이라도 걸겠다는 말과 고려 충신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기 직전 이방원과 만난 자리에서 부른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란 단심가의 한 구절과 유사해 발언 배경에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왕조를 세우려는 역성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 부자와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라 결국은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곧 정몽주의 처형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 있다. 정몽주는 고려에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 관료들의 지도자로서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얻고 있었다. 정권을 찬탈하려는 이성계와 맞서 갈등을 빚어오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기 전에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때 만남에 대해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며 하여가(何如歌)를 불러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의 단심가(丹心歌)는 고려 말기 대표적인 시조 작품이다.   단심가에서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철퇴로 살해시켰는데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한국의 초창기 성리학자로서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의례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고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한때 그의 친구이자 같은 스승 이색의 문하생인 정도전은 그를 가리켜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사청 설치에 대해 "직을 걸어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100번이라도 걸겠다"고 강조한 말이 조선3대 임금 이방원에게 불러준 정몽주의 단심가 중 `일백 번 죽고 죽어…`와 차이점이 무엇인지 후세 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까.
즐겨찾기+ 최종편집:2021-04-21 오전 06:39:15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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