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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는 권덕린의 정사(政事)와 절의(節義)

사)담수회 경주지부장·교육학박사 김영호
특별기고

경북신문 기자 / kua348@naver.com입력 : 2018년 12월 06일
↑↑ 사)담수회 경주지부장·교육학박사 김영호
통훈대부 귀봉 권덕린공은 1529년 안강현에서 출생하여, 1553년(명종8년) 25세의 나이로 대정공거 문과에 급제하여 45세까지 20년 동안 성균관 전적으로 첫 벼슬길에 올라 그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한 안동권씨 두류문중 경주출신 지방관이다. 

 공은 예조정랑과 병조정랑을 거쳐 회덕현감, 하동현감, 영천군수, 합천군수, 곤양군수 등 다섯 차례 지방 수령의 교지를 받고 넷 고을을 다스렸는데 곤양군수에 제수되어 부임길에 우연 득병하여 쾌유치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덜침석에서 45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종생하니 지인과
부고를 들은 합천의 인사들도 슬퍼하며 안루(眼淚)를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공은 은사인 회재 이언적선생의 가르침을 명심하며 청렴과 공평을 숭상하였고, 깨끗한 품성과 너그러운 덕으로 향민을 다스렸으며, 은사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옥산서원을 창건하여 향례를 봉행하였으니 그 보본절의는 만세의 귀감이 되어 전해오고 있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초당이 쓴 옥산서원기에 보면 "권덕린은 회재선생의 학도라 선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고 글을 지어 가지고 와서 전말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엽( )이 병이 나서 천연하게 늦추었더니 지금 권공은 세상을 버렸으니 소년부터 학문에 뜻이 있는 선비였는데 갑자기 여기에 이르니 이것은 무슨 운명인가. 죽은 친구의 부탁이 생각에 느껴졌어 옹졸하게 말을 써서 돌려보냈다"고 운운하였다. 또한 한강 정구선생이 지은 '해동이학연원록'에 권공은 회재 선생의 높은 제자라 하였으니 공의 학문은 처음부터 나온 곳이 있어 사문들이 이로서 공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서 권덕린공이 회재선생의 고제(高弟)였다는 것과 옥산서원을 세웠다는 것을 허초당과 정한강은 밝히고 있다.

 "공은 또한 모부인을 받들어 모시면서 얼굴을 대하시나 뜻을 순하게 하며 새벽과 저녁에 잠자리를 살피시며 바람이부나 비가 오나 하루라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아우 첨정공과 더불어 즐겁게 지내고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여 남달리 그 사이에 말이 없었다"는 귀봉권선생유사의 기록은 그의 효의(孝義)와 우애(友愛)가 깊고 돈독하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은 비록 많은 여생을 남겨둔 체 불혹의 나이에 안타깝게도 하세하였으나 생세에는 모부인을 지성으로 섬겨 양체양지(養體養志) 함에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형제간에 돈독한 우애로서 담락(湛樂)하게 생활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명심하며 청렴한 관료로서 공명정대하게 덕으로 정사를 폈던 것이며, 스승인 회재 이언적 선생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사은의 마음으로 옥산서원을 지어서 향례(享禮)를 봉행 하는 등 그 절의는 후세인에게 불후의 교훈적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공을 경모하던 향유들이 영조 14년(1738년)에 처음으로 강동면 왕신리 운천서원에 이언괄과 함께 배향 하였으나, 1745년에 훼철되어 정조 9년(1785년) 운곡에 추원사를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시조 태사공을 주벽으로, 죽림공을 동배, 귀봉공 서배로 배향해 오고 있다. 1976년에 추원사를 중건하고 운곡서원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의 하세 후 비록 410 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세태가 분란하니 다시금 본받지 않을 수 없는 위민정사(爲民政事)와 절의(節義)의 사적이라 생각되어 다시 밝혀본다.
경북신문 기자 / kua348@naver.com입력 : 2018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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