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갱신 기한이 넘어버렸다.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그리되었다. 여권이야 후에 다시 발급받으면 될 터고 전염병으로 나라의 문이 닫힌 당장은 사용할 일이 없어 크게 아쉽지는 않다. 또 나는 태생적으로 구멍지기라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부러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이 더 크게 다가와서다.   옆집 부부는 나와는 정반대다. 남편도 바쁜 틈틈이 외국 구경을 좋아하지만 부인도 빈번히 드나든다. 새롭고 낯선 곳을 찾아 돌아보는 것이 즐겁단다. 유럽의 선진문물도 그러하지만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나라에서 기쁨을 찾을 때가 많다. 얼마 전까지는 익숙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것들을 만날때 그렇게 반갑더란다. 돌아오면서 곧 바로 다음 여행을 계획할 정도다.  새해를 맞아 옆집부부와 마주 앉았다. 이런저런 가벼운 일상사를 나누던 중 여권만료이야기가 여행이야기로 이어졌다. 부인은 재작년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를 다녀온 추억을 꺼냈다. 일정 중에는 이제 보기 드물어진 어린 날의 향수를 자극하는 체험이 여러 개였고 그 중에 한가지가 반딧불이였다. 그 나라는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부부가 함께는 처음이라 신혼여행을 가는 듯 설레기까지 했단다. 동네친구끼리 결혼한 부부는 개똥벌레가 똥구녕에 빛을 내는 여름밤에 사랑을 키웠다.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만나는 추억 돌아보기는 특별할 것 같아 기대가 되더란다.   가이드를 따라 작은 배를 타고 강으로 나아갈 때까지는 밋밋했다. 다른 부부들은 어깨를 감싸기도 하고 손을 잡고 귀엣말도 하는데 허공만 멀뚱거리고 앉아있는 남편이 살짝 야속하기도 했지만 원래 표현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어쩌겠는가. 과묵함이 좋아 결혼해서 삼십년을 살았는데 이제와 트집을 잡을 수야!   강 가운데 멈춰 기다리자 강기슭에서 반짝반짝 하나씩 불빛이 나타나더니 온 천지가 보석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이 났다. 가슴 가운데가 울컥하며 감정이 격해지더라네. 사그라진 줄 알았던 불꽃이 확 달아오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보 사랑해" 아마 둘이만 있었다면 키스라도 했을 만큼 사랑이 충만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산통 깨는 소리로 되받았다. "됐다. 구경이나 해라" 갑자기 반딧불이가 개똥벌레가 되고 사방은 물비린내로 가득해졌다. 앞에 사람이 휙 돌아보기까지 하는데 무안스럽기도 했지만 인생이 흔들렸다. 딱 한마디 `나도 사랑해` 했더라면 그 배에서 박수를 받는 베스트 커플이 됐을 것을…. 부인뿐 아니라 동승했던 사람들도 분위기가 가라앉아버려 반딧불이쇼 흥은 사라지고 빨리 돌아가고만 싶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주변의 조연들이 빚는 갈등과 시간들이 맞물려 흐르며 극을 이끌어간다. 과정에 주인공 입장만을 부각시킨다. 따지고 보면 출연자 한명 한명이 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나름 주인공이지만 배경처럼 설정되어진다.  현실에서는 다르다. 자신의 인생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다. 주목을 받고 못받고의 차이일뿐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건에서는 중심 인물이 생기기 마련이다. 뭍 사람들 속에서 어느 순간 주인공이 될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찬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의도하여 만들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예기치 않을 때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기회를 잡고 못 잡고는 풍부한 인생 경험에서 오는 연륜인 듯하다. 인생 어디에나 반전의 기회는 있기 마련이다. 이야기의 끝이 그기까지였다면 필시 재미없는 추억에 그치거나 호텔방에 돌아와 투닥거렸다는 결론에 그쳤으리라. 그랬다면 오늘 자존심 센 부인이 굳이 입에 내어 말하지도 않았을 터다.   배가 선착장에 닿았을 때였다. 중심을 잃고 휘청하는 부인을 남편이 번쩍 안아서 내린 것이다. 남자의 힘과 매너를 보여준 남편을 같이 탔던 사람들은 관객이 되어 박수를 치며 환호해줬다. 그래서 각본 없는 드라마는 갈등의 위기를 넘기며 해피엔딩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남편이 인생의 묘미를 아는 사람인 듯하여 듣는것만으로도 새삼 멋있어 보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부인은 눈이 다시 게슴츠레해진다. 그때 감정이 떠오르는 걸까? 여전히 힘을 잃지 않은 남편의 팔뚝이 좋았는 걸까? 이러다 늦둥이라도 생기는 것 아니냐고 19금 진한 농담으로 웃었다.   옆집부부는 하루 빨리 전염병이 사라져 여행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바램이다.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하는 것과 비례되는 하고 싶은걸 제약받는 일상은 차라리 고통이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어 여행만 아니라 자유로운 일상이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한다. 그리고 반딧불이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여권부터 만들어얄까? 아니 1회용품부터 줄여볼까나!
즐겨찾기+ 최종편집:2021-03-02 오전 10:25:16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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