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되어 밤마다 가슴에 쏟아진 적이 있다. 어둠 속엔 그리움의 농도를 진하게 하는 힘이 내재돼 있어서인가 보다. 겨울밤 잠 못 이루는 시간 속의 어둠은 낮 동안 활발했던 사고思考를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토록 잡념을 차단시키곤 한다.   밤이 찾아오면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지우려 해도 끊임없이 가슴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 사랑했던 사람 환영幻影이다.   이룰 수 없는 첫사랑이어서일까.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을 전인식 시인은 자신의 시 `첫사랑`에서, `첫사랑은 무좀균/오랜 세월에도 박멸이 불가능한/지독한 박테리아/결혼해서 아이 둘 낳고 사는 지금도/아내 몰래 꼼지락꼼지락/발가락 사이 숨어 사는/ 한번 찾아들면/떠날 줄 모르는 그`-<생략> 라고 표현 하였다.   첫사랑의 이별이 안겨준 지독한 아픔과 그리움을 발가락 틈새에 자리 잡은 여간해서 뿌리 뽑을 수 없는 무좀 종균으로 바라봤다. 오죽하면 첫사랑의 추억과 이루지 못한 애틋함을 긁을수록 가렴증이 가시지 않는 지긋지긋한 무좀균에 빗대었을까.  필자에게도 초등학교 때 첫사랑은 찾아왔었다. 그 땐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인줄 조차도 미처 몰랐었다. 친구 오빠만 보면 가슴이 설레고, 먼발치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 그것이 훗날 돌이켜보니 첫사랑이자 짝사랑이기도 했다.   흔히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첫 사랑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엔 꼭 이별이 준비되어 있다고나 할까. 친구 오빠를 향했던 나의 연심은 불과 몇 달 못가 그 열정이 식고 말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철부지 풋사랑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친구 오빠 얼굴에 묻은 코딱지를 본 순간 그동안 지녔던 이미지가 크게 깨트려진 게 첫사랑의 신열을 식힌 원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코딱지마저 가끔 생각나는 것은 나이 탓이런가.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남았기에 아쉽고 그리움이 더욱 증폭 되는지도 모르겠다.   왜? 인간은 사랑을 하면 그야말로 눈이 멀까? 스탕달의 명작 `적과 흙`의 주인공만 살펴봐도 그렇잖은가. 주인공 줄리앙과 레날 부인이다. 줄리앙은 가정교사 아닌가. 레날 부인은 귀부인이다. 하지만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둘은 깊은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잖은가. 이로보아 사랑엔 나이, 국경, 신분, 직업의 귀천도 없다.   사랑은 청춘 남녀라면 아니 황혼에 이르러서도 앓게 되는 마음의 신열이다. 사랑은 사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여성은 자신의 전부를 걸고 남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남자는 사랑이 인생의 일부일 뿐이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여류 작가 스탈 부인은, " 여자에게 있어 사랑은 생애의 역사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한낱 삽화에 불과하다"라고 언술했다.   스탈 부인의 언명이 아니어도 남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회적 성취에 더 무게를 두곤 한다. 그래서인지 설령 실연을 당하여도 여성처럼 심적 타격이 크진 않다. 그러나 여자 경우 사랑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맡기기도 하여 지옥과 천국을 오가기도 하는가보다.  인생의 아름다운 축복인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향한 존경과 사모思慕가 뒤따라야 한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아끼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에서도 비롯된다. 이것이 아니라면 한낱 엔조이에 불과하다. 향락과 쾌락만 추구하는 육체적 유희는 진정성 있는 사랑이 아니잖은가.   스탕달의 말처럼 육체적 연애는 숲 속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시골 여인을 만나서 순간 빠지게 되는 쾌락적 연애가 아니던가.  하지만 현대엔 사랑의 주성분인 상대를 향한 존경심과 애틋한 그리움이 고갈 된 듯하다. 한 사람만 목숨 바쳐 사랑하는 순애殉愛는 옛일로 치부될 뿐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경우만 하여도 불륜 일색이잖은가. 예전과 달리 남녀가 사회 활동이 빈번한 탓에 이성을 만날 기회가 잦아서인가. 얕은 사랑을 구하곤 한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일생 동안 세 번 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수십 년 동안 가슴에 간직했다. 결혼 하고 자식까지 낳았지만 베아트리체를 한 시도 잊지 않은 단테였다. 어찌 한 사람만을 평생 동안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을까.   요즘 연인을 두고도 어장 관리니 양다리니 하는 따위의 가벼운 사랑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런 세태여서인지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향한 불변적 순정이 오묘하고 신비롭다. 플라톤조차 자신의 저서 `향연`에서 육체를 떠난 영적인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를 말하기도 했잖은가.  요즘 황혼 이혼이 꾸준히 늘고 있단다. 부부 간의 일은 두 사람 만이 안다고 말하지만 늘그막에 부부가 서로 연을 끊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이 가정이 `인내의 장소`라는 것을 인식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사노라면 연애 시절 미처 볼 수 없었던 배우자의 흠결이 하나둘 드러나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필자의 경우 가끔 결혼 생활에 권태기가 온다거나 배우자에게 지녔던 아름답던 마음이 훼손 될 때면 꼭 다시 써볼 안경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연애 할 때 썼던 맹목적의 안경이 그것이다.   또 있다. 고대 희랍 문필가 크세노폰의 언술도 가끔 가슴에서 꺼내 볼까 한다. "사랑은 이상한 안경을 쓰고 있다. 동銅을 황금으로 보이게 하고 가난한 것을 풍성하게 하는 안경을 쓰고 있다" 가 그것이다.
즐겨찾기+ 최종편집:2021-09-17 오전 09:05:33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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