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유독 흥이 많았나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한번만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르곤 했단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도 없던 그 시절,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춤까지 제법 잘 추었다고 한다.  대 여섯 살 때 일로 기억한다. 외가가 있는 시골 소읍에 음악 콩쿨 대회가 열린 적 있다. 당시 가마솥, 쌀가마 등을 상품으로 내걸고 치러진 음악 콩쿨 대회다. 여중생이었던 막내 이모를 따라 이 대회를 구경하던 중, 갑자기 잡았던 이모 손을 뿌리치고 무대 위로 뛰어 오르더란다.   그 때 한창 유행하던 김용만의 노래 `정열의 차차차`를 참가자가 마이크를 잡고 부르자 그 옆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열심히 추더란다. 무대 아래 사람들이 이 진풍경에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며 일제히 일어나 어르신들조차도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는 이모의 후일담이다.   그 이 후로 좁은 시골바닥에서 필자는 단연 춤의 신동으로 불리는 영예(?)마저 안았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글쟁이가 아닌 연예인에 도전했을 법한 재능이라고 가끔 어린 날 이야기를 들출 때마다 가족들 앞에서 이 사실을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과 달리 그 당시 부모님을 비롯 주위 사람들은 아이답지 않은 능력(?)에 적잖이 우려를 했다고 한다.   하나를 알려주면 적어도 몇 가지를 깨우치는, 아둔함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단다. 이를 본 부모님은 물론 친척들조차 훗날 비록 여자애지만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될 거라는 기대아닌 기대를 했단다.   이런 터수라 더욱 이 걱정은 심화 되었다고 했다. 어머닌 요즘도 엊그제 일처럼 어린 시절 나를 향했던 기우를 입버릇처럼 말한다. 어린 싹에서부터 일찍 일명 `딴따라` 성향을 지닌 듯하여 연예인이 될까봐 큰 걱정을 했다는 게 그것이다.  이런 염려가 적중할 뻔 한 일도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시일이었다. 학창 시절 어머니 몰래 서울에 있는 모 배우 학원을 1년 동안 다닌 게 그것이다.   소위 얼굴이 카메라 발이 잘 받는다는 배우 학원장의 꼬드김과 모 여성 잡지사의 표지 모델 권유가 꿈을 부추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용케 안 어머니의 적극적인 만류로 그 꿈은 얼마안가 모래성이 되고 말았다.  요즘 트로트 가수로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초등학생들이 텔레비전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장면을 대하곤 한다. 이를 볼 때마다 그 시절 일이 생각나서 격세지감마저 느낀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초등학생들 꿈을 꼽으라고 하면 연예인이 제 1순위라고 하였잖은가. 이 꿈을 이루게 하려고 유년 시절부터 연기 학원을 보내는 부모도 적지 않다는 이야길 들은 적 있다.  한 때 나는 야구장에서 춤을 추는 치어 리더들을 부러워 한 적 있다. 비록 직업적으로 의식된 춤이지만 바라보는 관객들 눈을 호사시키는 힘을 지녔다. 얼마나 흥겨운 춤사위인가.   춤의 속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즐겁고 기쁠 때 절로 팔, 다리, 그리고 온몸이 움직인다. 즉 감정의 발로에 기인한 몸짓이잖은가.   특히 사교춤은 교감의 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로 손을 잡고 상대방과 음악의 선율에 따라 호흡 및 발을 맞추는 춤 아닌가.   이것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해방 전에는 블루스, 지르박, 탱고, 폭스 트롯, 왈츠 정도였다. 그러다가 6·25 이후 50년 대 중반에 이르러선 강렬한 라틴 계통인 새로운 리듬의 맘보가 유행 했다.   이 춤이 선풍을 일으키자 김정애 `닐니리 맘보`(1952년), 심연옥 `도라지 맘보`(1953년), 현인 `나포리 맘보`(1957년) 등의 가수들이 부르는 유행가가 이 덕으로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다.   이 때 패션 및 헤어스타일의 대 유행에도 이 맘보춤이 일조를 했다. 맘보바지·맘보 머리가 그것이다. 당시 맘보 춤·맘보바지·맘보 머리까지 온 나라를 휩쓸었으니 그야말로 맘보의 시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때 시대상에 비추어본다면 6·25 전쟁 이후 허무주의에 편승한 서양 춤의 거센 바람이라 말 할 수 있다. 기름이 줄줄 흐르는 포마드를 잔뜩 발라 올백 및 리젠트 머리를 한 소위 여자를 울리는 제비족들도 있었다.   이들이 화려한 조명이 난무하는 카바레에서 직장 여성 및 유한마담들을 부둥켜안고 숨이 턱에 차도록 숨 가쁜 열기를 뿜어댔던 지난 50년 대였다.   춤바람의 광풍이 한바탕 한반도를 훑었던 것이다. 이 때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1955년 세칭 박인수 사건이 이를 방증하잖은가. 한국판 카사노바라 할 박인수였다. 70여 명의 양가집 규수나 유부녀들과 사통私通했다는 충격은 역시 춤바람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시대상을 비추는 거울격인 유행가 바람과 새로운 리듬의 춤바람은 이런 사회적 병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마치 봇물처럼 터져 6·25 전쟁 이후로 삭막하고 메마른 민초들 정서를 잠식하기에 바빴다.   그 후 50년 대 말 유행한 `차차차` 라는 춤은 1960년대 초반까지 유행 했다. 그 다음엔 `트위스트`가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이는 60년 대 말까지 그 여세를 몰았으며 70년대엔 `고고`라는 춤과 사이키델릭 음악도 인기였다.   1990년대엔 마카레나, 2000년 초반엔 `꼭지 점 댄스` 2012년에 싸이가 `강남스타일` 노래를 부르며 춘 `말 춤` 등은 유행가와 맞물려 우리의 몸을 한껏 뒤흔들게 하였다.  요즘 코로나 19 창궐 후 세계인들은 바이러스와 대적하느라 춤을 잊었다. 언제 지난날처럼 경쾌한 음악의 선율에 맞춰 온몸을 신나게 흔들며 춤을 출 수 있을까? 그 날이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즐겨찾기+ 최종편집:2021-10-22 오후 05:36:59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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