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석탈해왕릉탈해왕께서 23년간 왕위를 마치시고 서기80 년에 돌아가시자 궁궐인 월성 북쪽 양정(壤井)언덕에 왕릉을 모셨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약 600년이 지난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꿈에 탈해왕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탈해인데 나의 유골을 양정언덕에서 발굴하여 소상(塑像:흙이나 석회로 만드는 인체모형)을 만들어 동악(東岳:지금의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꼭대기)에 모셔라"하므로 문무왕은 그 말씀에 따라 발굴하니 두골의 둘레가 三尺餘(1m)가 조금 넘고 신장의 길이가 九尺(2m 70cm) 정도였다고 합니다. 드디어 현몽한 대로 토함산 마루에 소상을 안치하고, 그 옆에 탈해사(脫解祠)라는 제당을 세웠으며, 릉은 월성 북쪽 표암산 기슭(현 위치)에 모셨다고하니(이상 제10화와 일부 중복된 내용임) 지금의 탈해왕릉으로서 사적(史蹟)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는 바 관리는 정부(문화재청, 경상북도, 경주시)가 합동하여 담당하고 있다. ◆ 신라 왕들의 왕릉에 대한 진위(眞僞)신라 초대 박혁거세왕을 비롯한 박씨 10왕의 왕릉은 10위 모두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신라 석(昔)씨 8왕은 석탈해왕의 릉만 유일하게 있을 뿐 나머지 7왕의 릉은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김미추왕으로 시작한 김씨 38왕 중 24왕의 릉은 있으나 14왕의 릉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자기네 왕릉이 모두 다 있다고 좋아하거나, 일부를 찾지 못했다고 속상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솔직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박씨의 경우, 경주시 탑동에 있는 오릉(五陵)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혁거세왕과 왕비 알영부인, 그리고 박남해왕, 박유리왕, 박파사왕의 능묘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경주시 배동에 있는 삼릉(三陵)은 신라 8대 박아달라왕과 50대 박신덕왕, 54대 박경명왕의 능묘라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말기의 신덕왕과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년이란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였다는 사실은 받아 들이기 어렵다. 특히 신라 초기에는 이런 대형(큰) 무덤 자체가 없었으니 더욱 궁금하다. 김씨의 경우는 38왕 중 24왕의 릉은 있으나 14릉은 찾지 못하고 있다. 석탈해왕께서 서기 80년 8월 향년 85수(壽)로 붕어(崩御)하시매 궁궐인 월성 북쪽 소금강 양정구(壤井丘) 양지 바른 언덕에 왕릉을 모셨다는 기록과 그 후 약 600년이 지난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꿈에 나타나 마씀하신 바에 따라 소상(塑像)을 만들어 동악(東岳)에 모시고, 릉은 월성 북쪽 표암산 기슭(현 위치)에 모셨다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으로 보아 탈해왕릉은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경주시 대릉원과 황남동, 인왕동 등 일대에는 수십기의 능묘가 있으나 임자 없는 무명(無名)의 흙더미로만 보존될 뿐 주인을 찾지 못하는 아쉬움만 남겨두고 있다. 특히 찾지 못하는 석씨 7왕의 릉은 석씨 멸족의 재앙으로 없어졌거나 아니면 어디엔가 형체는 있어도 어느 왕의 릉이라는 내력이 끊어졌을 것으로 본다. 또한 석왕(昔王 9~12대와 14~16대 왕에 이은 金王 18대~22대) 왕의 릉도 찾지를 못하고 있는데, 9~22대 왕 중(13대 김미추왕과 17대 김미추왕을 제외한) 12왕의 릉은 대릉원 어디엔가 분명히 있을지도 모르는 영원한 숙제로 남는다. ◆ 초기의 재정지원서기1926년(병인년) 왕릉과 왕의 신위를 모신 전(殿)에서의 향사가 시작된 처음에는 춘추 향사비로 중앙에서 매년 129원 지원되었으나 후에 향비가 110원으로 삭감되자 부득이 위토답 3두락으로 향비 및 릉(陵)과 전(殿)의 유지관리비에 보충하였으며, 참봉 월봉은 19원으로 시작하여 순차적 인상되어 250원까지 보조된 바 있다. ◆ 석탈해왕릉 도굴 : [경향신문 1975년 1월 1일(수요일) 보도 내용]제목 : 경주 석탈해 왕릉 도굴. 유물 한점 없어 범인 3~4명 추정경주 석(昔)씨의 시조 신라 제4대 석탈해 왕릉이 30일 밤 도굴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31일 상오 10시 왕릉 감시원 노봉구(44)씨에 의해 확인, 경찰에 신고 되었는데, 도굴범들은 왕릉 동북쪽에서 높이 2m, 너비 0.85m, 깊이 4.4m까지 파내려 갔었다. 문화공보부 정재윤 경주 사적관리사무소 소장과 정양모 박물관장이 도굴 현장을 확인했는데 시체 안장실에는 유물이 하나도 없었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이 왕릉이 이장된 것으로 밝혀내고 본래 왕릉 안에는 유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이 왕릉은 높이 10m. 밑지름 15m로서 경주시 동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경찰은 도굴범이 3~4명이며 이 왕릉의 특징을 모르는 원정 도굴꾼의 소행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탈해 왕릉은 이미 1974년 12월 30일(월요일) 도굴 당하여 익일 신고되었고 이후 긴급 조사를 한 결과 그 내부는 `횡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석탈해왕릉은 서기 600년(文武王) 대에 발굴하여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 마루에 안치하고, 릉은 월성 북쪽 표암산 기슭(현 위치)에 모셨다고하니 그로부터도 1.400년이 지난 오늘 능침에서 도굴꾼이 노리는 보화가 나올 수는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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