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의 이란 제재 복원으로 한때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했던 대이란 교류가 다시 막혔다. 그러나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지로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의 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이란의 이야기를 통해 21세기 실크로드를 꿈꿔본다. 시라즈는 페르시아 제국의 원형질을 찾을 수 있는 고도이기 때문에 이란을 방문한 여행자들은 반드시 시라즈를 찾는다. 테헤란에서 중간의 다른 도시를 거쳐 시라즈로 향하는 여행자들은 버스 차창으로 펼쳐지는 황량한 사막지형에 압도당한다.  ■ 압도적 사막지형 속 오아시스 도시 헐벗은 돌산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바싹 마른 사막을 가로질러 굵은 핏줄처럼 고속도로가 뻗어있다. 그 모습을 두고 이란을 `열사의 나라`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처럼 여겨지는 특이한 모습의 사막이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 느닷없이 오아시스 도시가 하나 나타난다. 바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 최초의 수도인 파사르가드다. 파사르가드는 이란 남부의 비옥한 오아시스 지대인 `파스`의 중심지로 페르시아라는 제국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됐다. 이 도시는 B.C. 546년 키루스 대왕(B.C. 600~B.C. 529)이 건설했다. 구약성서에 전하는 고레스왕이 바로 키루스 대왕이다. 키루스라는 이름은 `태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태양신 숭배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B.C. 539년 바빌론의 벨샤자르왕이 베푼 연회에서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창건했다. 세계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기록된 아키메네스 페르시아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 관용과 배려의 정치 편 `성군` 키루스 대왕 키루스 대왕은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는 제국을 세운 후 지금의 터키 지역의 리디아국과 이라크 지역의 바빌론까지 점령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한다. 수많은 이웃나라들과 부족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도 그는 어떻게 하면 이들을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통치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문화와 왕조의 전통, 종교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제국의 억압을 실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바빌론을 점령한 후에 칙령을 내려 바빌론에서 끌려온 유대인을 풀어준다. 이 사실은 구약성서 에스라서 제1장에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데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키루스 대왕이 유대인들로부터 찬양을 받는 이유다. 그는 적국이었던 그리스에서도 군주로 칭송을 받았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바로 관용과 융합, 유화정책 덕분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르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사`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왜냐하면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줬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 쐐기문자로 쓴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 그런 키루스 대왕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초의 선언을 한다. 여러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바빌론 주민의 생계를 향상하며 포로로 끌려온 민족과 그들이 가진 종교적 상징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자신의 군인들이 점령지 백성들에게 위협을 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자신의 개혁 의지를 점령지에 전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인 셈이다. 키루스 대왕의 통치이념이 담긴 이 선언은 길이 23cm, 지름 10cm 크기의 석조 원통에 쐐기문자로 쓰여 있다. 이 원통을 `키루스 실린더`라고 한다. `키루스 실린더`는 1879년 이라크 바빌론 고대 신전에서 이라크 모술 출신의 영국인 호르무즈드 라삼이 발견했다. 그리고 영국 대영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 됐으며 뉴욕의 UN본부에도 복사품이 전시돼 있다. 키루스 대왕의 선언은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에 영향을 줬고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본 철학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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