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에 손바닥만한 뜰을 가꿉니다. 겨울에 죽은 듯 깊은 잠을 자던 식물들이 봄이 오는 것을 어찌 알고 때 맞춰 얼굴을 내밉니다. 그러다가 일이 있어 한참만에 시골집 마당에 오면 경이롭게 자라 있는 풀들을 봅니다. 거기서 나는 잠깐 망설임에 흔들립니다. 저 풀들을 그냥 둘까? 아니지, 그러면 쟤네들 기세에 잔디나 다른 꽃이 눌리게 될 걸?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냉이, 꽃다지, 꽃마리, 봄맞이꽃, 민들레, 제비꽃, 살갈퀴, 토끼풀, 쇠뜨기, 꿀풀, 지칭개, 별꽃 등 가짓수도 많습니다. 가만히 살피면 풀도 나름대로 올라오는 순서가 있더군요. 제일 먼저 꽃다지, 냉이, 제비꽃, 민들레 같은 것들이 먼저 나오고, 겨우 다 뽑았다 방심하는 사이에 살갈퀴, 괭이밥, 붉은 토끼풀이 다음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아주, 비름, 쇠비름, 강아지풀들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에 맞춰 잔디 속에 섞여 올라오는 풀들을 뽑으며 아주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잔디밭이 가지런하고 보기 좋으라고 잔디 사이사이에 올라오는 풀들을 잡초라 하며 보이는 대로 뽑아서 버리는 나의 행동에 한 번씩은 죄책감조차 들려고 합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당당한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디나 아이리스, 장미, 수선화, 모란 같은 선택적으로 심겨진 풀이나 화려한 꽃들에 밀려 `잡초`라고 뭉뚱그려 뽑아버리는 것이 썩 미안하게만 느껴집니다. 잡초들도 각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요.  최근 한 장관후보자의 적격성을 검증하는 청문회에서 자녀의 논문과 봉사활동 내용이 도마 위에 올라 따따부따하는 과정에 사전 준비가 미흡했던 질문자로 인해 웃지 못할 씁쓸한 장면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모 전장관의 딸이 논문 위조 및 허위 봉사활동이 드러나 대학 입학이 취소되고 심지어 의사 면허도 취소된 일도 있지요. 그러면 왜 정부 고위층의 청문 과정에 자녀들의 학력이나 학업 따위가 문제로 대두되는 걸까요? 그것에 대해서 나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경쟁 위주의 능력주의가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풀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풀인데 사람들 필요에 의해 잡초와 화초로 구분지어 버리는 것처럼 사회, 경제적으로 상류층이 되거나, 그렇지 못한 소위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로 한꺼번에 몰아서 분류당하는 이원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학에서 수시로 학생을 선발할 때 평가기준으로 `학생부종합전형`이 등장한 게 1997년부터입니다. 이것은 교과 성적 외에도 자기소개서, 수상경력, 창의적 체험활동, 봉사활동 등을 반영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소논문, 올림피아드 같은 경연대회의 입상, 리더 경력, 문화적 활동 등 옆에서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학생 혼자서 그것을 다 채우기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결국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부모의 관리가 있는 경우에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먼저 얻게 되겠지요. 그런 점 때문에 현대판 음서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상류층의 부모를 둔 자녀가 명문대로 가는 비율이 소위 `가붕개`층의 자녀보다 높다는 것은 그들이 장미나 함박꽃처럼 다른 꽃보다 탁월하게 빛나는 꽃으로 가꾸려는 목적으로 길러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언제부턴가 우리는 개천에서 나는 용을 보지 못합니다. 계층을 올라가는 사다리도 없어졌습니다. 서울 명문대 입학생의 절반 가량이 서울 강남구의 고소득층 부모를 가졌다는 사실이 위의 사회 현상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특목고, 외고, 자사고 등, 일반고에 비해 관리를 좀 더 받을 수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은 우수한 성적 외에 비싼 학비를 지원해 줄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다 보니 자녀의 학교생활이 청문회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가 봅니다.  노란 애기똥풀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갓길을 본 적 있나요? 살갈퀴가 무더기무더기 보라색 꽃을 피워낸 강가도 환상적이지요? 잡초라고 뽑아 던져지던 풀도 제 자리를 찾아 놓이면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대부분의 우리 보통 사람은 적절한 자리에서 마땅한 제 구실을 찾아 살려고 애쓰는 잡초들입니다. 나도 물론 잡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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