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가운데에는 200여 년쯤 되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늙은 당수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이 나무는 한눈에 봐도 호호 할아버지 나무라고 할 만큼 나무의 껍질이 벗겨져 있었고 나뭇가지도 그리 많지 않아 봄이 되어도 새잎은 듬성듬성 밖에 돋지 않아서 철부지 시절, 우리는 죽은 나무처럼 여겼다.   당수나무 앞에는 화강암으로 된 제단이 놓여있어 평소에는 제단 위에 주저앉아 소꿉놀이도 하고 풀잎 뭉치로 선을 그으면 녹색 줄이 생기므로 임시 장기판을 만들어 장기를 두는 형들도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은 화강암 돌이 햇빛에 달구어져 누우면 온돌방처럼 따뜻해서 금방 낮잠이 들곤 했다. 겨울이면 그 자리를 서로 앉으려고 자리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고목나무 가지가 아래까지 뻗어 있어 제단을 밟고 당수나무 위를 쉽게 올라 갈 수 있어서 나무에 올라타고 많이 놀았다.   나무 아래는 광장처럼 넓은 공간도 있어서 정말 놀기에는 제격인 장소였지만 마을의 어르신들에게는 신성하면서도 중요한 공간이었다. 논의의 장이 되기도 했고 해마다 치러지는 마을 행사의 메인무대이기도 했다.   당수나무 아래서 치러지던 행사 중 나에게 가장 재미있고 즐거웠던 것은 풍물놀이 였다. 동지날. 설날. 정월대보름. 추석 등 고유명절의 민속놀이 때는 항상 빠지지 않는 놀이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사물놀이라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물놀이란 단어가 생기지 않았을 때라 풍물놀이라 했다.풍물놀이패 행렬에는 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와 같이 참여했다.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집마다 돌면서 집안의 나쁜 기운을 쫓고 좋은 기운이 들어오길 기원하며 동시에 가족들의 건강을 빌었다. 풍물 소리는 온 마을이 떠나갈듯 울려 대었고 그 왁자한 즐거움이란...,   지금 돌이켜 보면, 풍물소리는 단순한 리듬이 계속 반복적으로 돌고 도는 진행인데 그때 내 귀에는 어찌나 재밌고 흥겹게 들리는지.   꽹과리 패턴을 허벅지에 따라치면서 풍물리듬에 푹 빠져서 온종일 따라다니다 저녁엔 요즘말로 ‘떡실신’이 되어 잠이 들곤 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늘 풍물놀이의 메인 멤버셨다.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흥이 많고 리듬감이 좋았는지 마을에서는 이미 재미지게 놀 줄 아시고 여흥을 즐길 줄 아는 멋진 분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풍물놀이를 종일 한바탕 하고 들어오시면 이튿날 어깨가 아파서 일을 잘하지 못하실 정도였고 가족 친지들의 연중행사에서도 장단을 맞춰가며 끊임없이 노래 부르시는 유명한 분이셨다.   아마 나의 끼도 그 원천을 찾는다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풍물놀이 행사를 앞둔 어느 날, 그날도 아버지께서 잠시 연습을 하시다 어딘가를 가신 사이에 나는 바닥에 놓여진 꽹과리를 보았고 호기심을 참지 못해 꽹과리를 들고 어른들이 치던 리듬을 혼자서 쳐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몰입이 되어 치고 있었는지 어느새 돌아온 아버지께서 “너... 한번 같이 해볼래?”라고 제의하셨다.   나는 부끄럼없이 너무나 기쁜 마음에 대답을 했고 풍물패 주요 멤버 분들에게 뭐라 말씀을 하셨던지 나를 준비하게 하신 뒤 ‘네가 상쇠 역할이라 먼저 치고 시작하라’고 하셨다.    난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치고 들어갔고 나머지 분들이 합세를 해오며 신기하게도 악기소리 전체가 어우러지면서 리듬이 착착 들어맞는 걸 느끼며 머리카락이 쫑긋하게 서고 몸 전체가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 순간이 나의 최초 앙상블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고 즐겁다. 통상 운동신경은 달리기로 평가하고 음악의 감각은 리듬감으로 확인한다. 그래서 그날 이후론 타악기에 흠뻑 빠져서 틈만 나면 두들기며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를 따라 장날 시내에 갈 일이 생기게 되었다. 약장수가 약을 팔러 온 모양인지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었고 멀리서부터 시끌시끌했다.   장사치가 원숭이를 데리고 생전 첨보는 여러 개 북으로 만든 악기를 쳐가면서 쇼를 하고 있었다.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물놀이에서 듣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악기. 원숭이의 재롱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고 장사치의 손과 북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 가고 엄마는 장을 봐야 해서 나를 재촉했지만 내 발은 떨어지질 않았고 결국 엄마는 내게 다른 데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스무 번쯤 받은 후에야 장을 보러 가셨다.   어머니는 아직도 그 얘기를 가끔 하신다. 몇 시간을 장을 보고 오셨는데 그때까지도 있던 그 자리, 북 옆에서 조금도 안 움직이고 눈도 못 떼고 있더라고...,   물론 어머니는 주변에 아는 분께 나를 부탁하고 가셨었고 그 사람도 저런 애가 다 있냐고 혀를 내 두르셨다고 한다.   나중에야 그것이 드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장에서 돌아오고 며칠을 드럼이 생각 나서 친구들과 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결국 그것을 재현해서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나무 각목을 뼈대로 세운 뒤 합판을 둥글게 잘라 드럼 형태를 만들었으나 마지막에 심벌이 문제였다. 그래서 주위의 냄비 뚜껑을 주워 걸어서 의자에 걸터앉으니 제법 드럼의 형상이 갖춰졌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께서 불쑥 나타나셨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풍물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라도 드럼은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는 걸 만든다고 야단맞을 각오로 바짝 긴장 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아버지께서는 뭐하는지 물으시더니 꾸지람은커녕 기특했는지 아니면 당신께서도 좋아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림으로 그려보라시며 못질도 제대로 해주셨다.   이튿날 일어나보니 찌그러진 냄비 뚜껑은 없어지고 멀쩡한 큰 솥뚜껑이 걸려 있었다. 엄청 기분이 좋았고 아버지와 나는 같은 취향인 걸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뮤지션으로, 아티스트로 긴 세월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든든한 정신적 후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질적으론 풍요롭지 못했을지 몰라도 아버지의 그늘에 있을 땐 단 한 번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게 해주셨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2013년 7월 31일 92세의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현란하게 북을 치시고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과 풍류를 즐기고 계시진 않은지..., 아버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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