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쯤 우리 마을은 정부에서 계획한 거대한 리조트와 큰 댐 공사로 인해 수용지역으로 묶여져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중심에서 산업사회로 진화해 가는 시점에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라 다른 마을에는 전기도 들어오고 지붕과 도로의 모습들이 바뀌어가고 있었지만, 우리 동네는 리조트 계획에 고립되어 10여 년간 공사 현장 환경에서 살았다.   그때의 현장이 지금은 골프장. 리조트. 놀이동산. 워터파크 등의 위락시설로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이 가장 붐비는 유원지인 경주보문 관광단지로 조성됐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 아이들의 놀이 풍경은 봄이 되면 보리밭에서 뛰어놀며 각종 식물 이파리로 풀피리를 만들어 불며 다녔고 죄 없는 개구리를 잡으려고 온 동네를 찾아 헤매고 다니곤 했다.   학교와 마을로 오는 지름길이 하나 있었는데 ‘햇볕 따뜻한 산길’ 이라는 뜻의 ‘양산 길’이라는 길이었다.   양산길로 갈 때면 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도록 맛나게 먹기도 하고 피곤하면 양지바른 무덤 곁에서 잠을 자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늘 자연에서 자란 우리에겐 무덤도 자연의 일부였으므로 무섭다기 보다는 참으로 따뜻하고 포근했다고 하면 요즘 사람들은 믿을까?   여름에는 비가 자주 왔는데 마을 앞 강은 늘 이산 저산 합쳐진 물이 불어나 홍수가 지곤 했다. 그 센 물살에 징검다리는 흔적도 없이 떠내려 가버렸다.   버스를 타려면 강을 건너 큰 도로까지 가야했기에 홍수가 지나간 후에는 항상 마을 남자들이 전부 모여 ‘뚝다리(징검다리)’보수작업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뚝다리는 금방 뚝딱 만들어지고 홍수에 뚝딱 없어져 버린다고 해서뚝다리라 불리어진 것 같다.   힘 좋은 아저씨들은 서로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고 천하장사처럼 훌쩍 돌을 안고 와 던지기도 하고 전날 술인지 뭔지, 무리한 아저씨들은 쑥스러운지 돌을 굴려오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늘어놓기도 하셨다.   그런 남자 어른들의 왁자한 농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같이 웃기도 하고 새참으로 받아 놓은 막걸리를 홀짝홀짝 얻어 마시며 막연하게 ‘어른이란 이런 것이구나’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뚝다리를 만들때의 그 시끌시끌함은 조용하던 마을에서 일어난 하나의 여름 이벤트였고 어렸던 우리는 신이 났다.   우리들은 날씨가 좋은 날이면 타잔처럼 팬티만 입고 종일 멱을 감았다. 강가에 물길을 따로 만들어 끝 지점에 소쿠리를 묻어놓고 풀잎 가지로 얹어 위장해놓으면 송사리가 물길 따라 떼 지어 올라와 소쿠리 안으로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그때 소쿠리를 떠올리면 송사리와 잡어들이 한 소쿠리 가득 담겼다.   그날 저녁 메뉴는 민물 매운탕으로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모기퇴치용 모닥불을 피워놓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온 동네 집 집마다 매운탕 파티가 잦았다.    또 장마철이 끝날 무렵에는 강물이 불어 마을은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상태가 됐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강물이 줄기 전에는 시내에 장을 보러 가지 못하셨다.    그래도 강물 광경에 마냥 신이 난 우리들은 윗마을 낭떠러지 바위 위에 올라가서 다이빙 선수처럼 알몸으로 겁도 없이 뛰어내려 차가운 물속에서도 깔깔대며 아랫마을까지둥둥 떠내려가며 놀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그때 홍수에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해도 왜 어른들은 꾸지람을 하지 않았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저녁때쯤이면 사람들이 마을 입구 경로당, 구판장(구멍가게)주위로 어슬렁어슬렁 모여들면서 세대별로 각각 나눠 제각각의 화젯거리를 만들어 무아지경에 빠진다.   가끔은 동네 형들과 누나들은 다른 마을로 원정을 가기도 하고 또 그 동네에서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아랫마을에 형들이 동네로 원정을 왔다.    그 형들은 마을 입구 언덕에 앉아 우리 동네에는 없었던 처음 보는 악기로 반주를 하면서 신나게 노래를 하고 있었다.   환상적인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이고 온몸이 귀가 된 듯 나를 압도해 버렸다. 도대체 세상에 저런 악기가 있었나?    조심스레 악기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니 “야! 저리 안가!”하고 어떤 형이 호통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관심은 악기밖엔 없었다. 오로지 악기소리만 들려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여러 음이 동시에 울리는 화음이 얼마나 짜릿하고 소름이 돋았는지 너무나 황홀했다. 노는데 방해된다고 형들이 나를 향해 큰소리로 뭐라 해도 내 눈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그 사람만 보여 멍하게 서 있었다.   아무리 해도 갈 기미를 안 보이자 개긴다고 생각한 어떤 형이 본격적으로 본때를 보여 주려고 손을 치켜들었다.   그때 마침 합류한 우리 마을 형이 “야, 임마 이놈이 우리마을에 이 가수다. 야야!! 그냥 냅둬라! 야는 이 악기 소리 땜에 꽂혀서 그라는기다 아이가! 맞제?”라고 얘기해줘 그대로 구경하게 내버려 두었다. 얼마나 그 형이 고마웠던지...,   그날 목격한 그 악기는 바로 통기타였다. 그날 기타라는 악기를 태어나 처음으로 구경하게 되었고 여러 음을 동시에 치는 화음의 구성음, 코드의 울림이 그렇게 좋은지 처음 느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기타 소리가 귓전에서 윙윙대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이후 그 기타소리를 잊을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여름 방학이 되어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작은집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근데 이게 무슨 신의 도움인가? 사촌 형의 방 장롱 위에 기타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몇 개인가 줄이 끊어져 있었지만 황금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환호성을 내지르며 와락 기타를 껴안았다.   연주는 고사하고 기타 소리조차도 내는 방법을 모르던 나는 그냥 땅에 눕혀서 가야금을 연주하듯 시작했고 소리를 내는 그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하루 종일 손가락에 물집이 생겨가면서 아픈 줄도 모르고 기타에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고 작은집 바로 앞이 해수욕장인데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해수욕장은 보이지 않고 기타만 실컷 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프로 연주인들 중에는 악기에 대한 지대한 호기심으로 독학으로 시작해서 전문가가 되는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다.   남들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본인이 재밌게 느껴진다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음악이 내게는 너무 재미있었기에 지금까지 긴 세월을 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