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주 교동과 최부잣집의 놀랍고도 진귀한 이야기를 흥미로운 서사로 진술한 ‘경주 교동과 최부자(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가 발간됐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 최부잣집이 교촌으로 이거하면서 다시 격동의 근현대사 중심에 섰던 지점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은 대대로 전해진 구전과 함께 무궁무진하다.   또 2018년 여름, 300여 년간 이어져 온 조선의 대표적인 부자 가문으로 이웃을 위해 곳간 문을 활짝 열었던 최부잣집 창고에서 수만 건에 이르는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전해진 이야기들은 담론을 넘어 명징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경주 교동 최부잣집과 관련한 숨가빴던 경주 근현대사를 소환하려 한다.   그 첫 회로, 77번째 광복절을 앞두고 1900~1940년대 독립운동 지사들이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집을 다녀간 흔적을 당시의 명함으로 남겨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경주 교동과 최부자’의 저자인 최혁 선생과의 인터뷰와 책을 기저로 구성하고 사진과 자료들은 경주최부잣집에서 제공했음을 밝힌다. 2018년 여름, 최부잣집 창고에서 수만 건에 달하는 문서들이 발견됐다. 이 문서와 자료들은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가 우연한 기회로 창고를 열었고 평소 예사롭게만 봤었던 큰 궤짝 세 개에서 쏟아졌다.   누대에 걸쳐 켜켜이 쌓여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그대로 증명한 보물급 문서들이 세상과 눈부시게 조우한 것이다.    이 기록유산들은 최부잣집의 정신적 보물로서 조선후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직 해제되지 않은 200~300년 전의 서류와 귀중한 문서만 해도 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경주 자산으로도 매우 소중한 이 기록유물을 제대로 조명해야 하는 과제도 남겨두고 있다.   발견된 문서들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서책과 편지, 공문서, 명함, 옛 신문 등의 수만 건 자료들이었다.    최부잣집이 영남대학교에 서책류 일체를 기증한 이후 남아 있던 집안의 사적(私的) 문서들의 발견이었다. 이들 문서들은 ‘1970년 최부잣집 사랑채에 불이 나 급히 자료들을 모두 밖으로 꺼냈는데 경황이 없다 보니 창고에 있는 큰 궤짝 속에 급하게 집어넣어 지금껏 보존’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자료에서는 최부자가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 도덕적 의무를 충실히 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많았다.   1907년 나랏빚을 갚기 위해 봉기된 국채보상운동의 경주지역 명단이 적힌 ‘경주국채보상운동 단연회’ 스토리, 최부잣집이 독립운동자금을 댔다는 구체적인 물증들이 다수 포함돼있는 문서들에선 선조들의 구국정신과 정신의 향기가 손에 잡힐 듯 선연하다.   특히 독립운동관련 자료도 상당 부분 발견됐는데, 독립기념관팀이 이 자료를 보고 나서는 기존의 독립운동에서 빠진 부분을 거의 메꿀 수 있을 정도라면서 놀랐다고 한다. ‘새롭게 독립운동 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는 후문이다.   최부잣집은 이강년, 이중린 등 을미의병을 지원했고 최익현과 의병 장군 신돌석이 찾아왔으며 11대 최부자 최현식은 경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었다. 일제강점기 자금을 모집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최부잣집을 중요한 자금 제공처로 여겼을 것이다.   이 유물자료들 중에서 100년 전 당시 양식의 독립운동가 명함이 20여 장 나왔다. 물론, 이 명함 이외에도 엽서나 간찰, 문서 등에서 전국적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가 많지만 20여명은 발견된 명함에만 한한 인물이다.   경상도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평안도와 연해주 독립운동가 명함까지 있었다.  이 명함의 주인공들은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최완 형제를 비롯해 정연규, 백용혁, 김석하, 김재열, 장지동, 이승옥, 오동훈, 장두문, 김상옥, 이종룡, 허철, 허규, 김진, 김이섭, 이명건, 한흥교, 손병규, 양재옥 등이다. 최부자댁에 명함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한 이들이었다. 3.1운동에 참여해 감옥살이를 한 뒤 독립자금 모집에 주력한 것이다.   그들의 명함 중 상당수는 왜 최부잣집에서 나오게 됐는지 알기 힘들다. 더욱이 연해주 독립운동가 김진의 명함이 어떻게 이곳에서 발견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중 몇 명을 소개한다.   ‘대한제국 육군 김석하 참위’라고 적혀 있는 명함이 눈에 띈다. 김석하는 1907년 대한제국 해산군인으로 의병에 참여했다.    경기도 양주와 가평에서 의병장 박내병의 참모로 활동하다가 박내병이 전사하자 대신 부대를 이끌었다. 1908년 8월경 강원도 인제에서 교전하던 중 순국했다.   그가 남긴 명함에는 ‘최영조 인형 전(崔泳祚 仁兄 殿)’이라는 김석하의 친필이 적혀 있다. 최영조는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초명이다. 최준의 초명을 사용한 것을 보아 친밀한 사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석하는 자신이 소속된 부대의 의병장이 전사하자 부대를 대신 지휘하며 여러 차례 승리한다. 일본의 화력에 밀려 용인에서 시작한 그의 부대는 강원도 인제까지 후퇴했고 김석하는 결국 그곳에서 전사했다.   이명건(이여성)은 식민통치를 통계로 폭로한 이로 유명하다. 이명건은 화가 이쾌대의 형으로 투철한 민족주의 독립투사로서 학자이자 사상가, 화가로서도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1930년대 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펼쳤다. ‘수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를 집필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통치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친 연구서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왜곡하는 조선총독부 통계수치를 해부했다.   김이섭은 임시정부 법무장관 김응섭의 형이자 최부자 최준의 처삼촌이다. 1919년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주동적 역할을 했는데 류관식 등과 함께 출연한 독립자금을 동생 김응섭이 상해로 망명할 때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때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허규는 시인 이육사의 외삼촌으로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이육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3·1운동에 참여해 투옥됐다가 1925년 만주로 가서 김규식, 김구, 여운형 등과 독립운동을 했다.    임시정부의 지시로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을 목적으로 국내에서 들어왔다가 체포돼 5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김구와 함께 통일 조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정계와는 관계를 끊고 최부자 최준과 `아양음사(峨洋吟社)`창립했다. 경주 교동과 최부잣집 저자인 최혁 선생은 “최부자댁에 명함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은 대중에 널리 알려진 지사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명함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그들의 숨은 노력과 헌신이 재조명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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