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년 전 경주 교동 최부잣집과 관련한 숨가빴던 경주 근현대사 이야기 그 두 번째로는, 최부잣집에서 이육사 선생과 범부 김정설 선생, 권오설, 신성모 등 당대 뛰어난 인물들에게 지원을 통해 후원했던 스토리다.   이런 정황들은 2018년 최부잣집 창고에서 발견된 수만 건에 이르는 문서들 중, 범부 선생, 권오설 선생 등이 최준 선생에게 보낸 국한문 혼용 엽서 등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독립투사요, 민족적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는 자신의 시 ‘광야’의 초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 39세로 베이징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7차례나 체포 투옥됐다.    건강이 악화된 그는 경주 남산 자락 옥룡암에 요양하러 두 번 왔다. 육사 선생이 투옥됐다 나온 후 석 달간 머물렀다는 옥룡암의 요사채로 보이는 ‘삼소헌(三笑軒)’이라는 단촐한 세 칸짜리 절방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육사가 경주에 머무른 흔적은 1942년 막역한 지기였던 시인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 이육사 문학관 자료에서도 육사는 1936년과 1942년 경주 옥룡암을 찾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육사 선생의 외동 따님이신 이옥비 여사는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져 옥룡암이 조용하고 요양하기 좋아서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경주에 왔을 때, 당시 곤궁했던 육사의 처지를 후원한 이규인(수봉재단 설립자)과의 인연도 있는가하면, 교동에도 방문했는데 이는 최준도 그의 형제들을 후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최부잣집이 육사를 후원하게 된 것은 육사의 외삼촌 허규가 최준의 평생 동지이자 벗이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가인 외삼촌 허규는 이육사 형제가 독립운동을 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육사는 최부잣집과 두 가지로 연결되는데, 하나는 외삼촌 허규와의 관계로 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준이 안동 김시현과도 친구 사이였던 것에서다. 즉, 허규, 최준, 김시현은 친구였다.    최준의 동지 김시현은 이육사를 난징으로 데려가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에 1기로 입학시켰다. 육사가 옥룡암에 왔을 때 같이 어울렸던 사람 중 최준의 차남 최용도 육사를 ‘선배’라고 부르며 함께 했다고 한다. 이로써 육사와 최부잣집의 연결고리를 짐작할 수 있다.   ‘경주 교동과 최부자’의 저자 최혁은 “당시 경북 지방 독립운동 집안들끼리는 실제 왕래뿐만 아니라 독립자금 관련 등으로 다 얽혀 있었다. 최근까지 최부잣집 주손 최염 선생과 이 집안들과 왕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시인 신석초가 소장하고 있던 ‘옥룡암에서’ 라는 제목의 편지글에서는 ‘...초략// ‘석초형! 나는 지금 이 너르다는 천지에 진실로 나 하나만이 남아 있는 외로운 넋인듯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석초형,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 허(許)에 있는 옛날 신라가 번성할 때 신인사의 고지(古趾)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하략//’라고 쓰고 있다.   당시 이육사의 청포도는 경주 옥룡암에서 초고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같이 지내던 후배 이식우(경주고 교장 역임)에게 “청포도는 조선이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조선의 독립이 익어가니 일본은 곧 망한다”라고 했다.   최준은 6.10만세 운동을 기획한 권오설 (1897~1930)도 후원했다. 권오설은 안동 가일마을 출신이다. 이 마을은 독립운동가를 열두 명이나 배출했다.    최준이 어떤 인연으로 권오설을 후원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 처가였던 오미마을을 통해서 권오설의 영특함과 열성을 전해 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권오설은 최준의 후원으로 대구고보를 다녔는데 독서회 사건 같은 것으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 뒤 전남도청에 고용원으로 취직해 있던 중 광주 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이 일어나자 주도적으로 참여해 체포 투옥되었다. 또 1926년에 순종 황제가 돌아가시자 6.10만세 운동을 기획했다.   최준은 이육사와 권오설 외에도 많은 인재를 후원했다.   1919년, 3·1 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청년 세대가 민족 독립과 민족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난한 청년 인재에게 외국 유학의 길을 열어 주고자 설립된 단체인 `기미육영회`에서 일본 유학을 시킨 이들이 많이 있다.   기미육영회는 신성모, 문시환, 안호상 이외에도 많은 인재를 후원했다. 실질적 기미육영회의 최대 후원자는 최준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최준이 개인적으로 보낸 사람은 범부 김정설 등이라고 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은 범부 김정설(1897∼1966)이다.   경주가 낳은 천재적 사상가이자 근현대기 한국 사상과 학술의 씨를 뿌린 김범부를 일컬어 미당 서정주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했다. 김범부는 우리에겐 경주가 낳은 대문호 김동리 선생의 친형으로 더욱 친숙하다.   범부는 3남 2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막내로 남동생 동리가 있었다. 나이차는 16살. 범부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따른 이가 동리(1913~1995)였다.    동리와 범부는 보통의 동기간을 넘어서는 것으로 동리에게 범부는 형님이자 큰 스승이었다. 일생 범부와 동리는 상생의 길을 걸었다.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김정근 명예교수의 ‘풍류 정신의 사람 김범부의 삶을 찾아서’에서는 ‘범부는 19세(1915년)에 ‘백산상회’의 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한국전쟁 직후 교동 최준 선생에 의해 계림대학이 설립되고 59세(1955년)에 경주계림대학장에 취임한다’고 썼다.   이 대목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창립된 역사적인 곳이 바로 교촌 최부자 고택이다.    이 회사를 창립한 후 최부자댁 재산은 무역대금 명목이었지만 독립자금으로 상하이와 만주로 보내졌으니 백산무역의 장학생인 범부에게 실질적 후원은 최부자가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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