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의 흔적은 소풍날에 찍은 단체 사진과 학교 졸업사진뿐이다. 사진속의 촌스런 나의 모습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검정 고무신이다.     그 시절엔 평소 늘 검정고무신으로 생활했고 운동화는 특별한 날이나 소풍, 명절 때만  신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주 드물게 특별히 운동화를 새로 사러 가기 전날 밤은 설레어서 밤잠을 설쳤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아버지 옆에 앉아서 부지깽이로 박자를 맞추며 콧노래를 부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 희야가 엄마하고 오늘 장에 간다고 기분이 좋은갑네” 하신다. “오늘 운동화 사준다고 했니더. 이번에는 내발에 맞는 신발 사면 좋겠는데요. 너무 큰거를 신으니까 빨리 뛰지도 못하고 부끄러워서요”  “그래도 쪼매 낙낙한 거를 사야 내년까지 신을수가 있잖아” 아버지께선  온갖 얘기로 나를 달래셨다. 엄마와 장에 나설 때는 설레서 엄마보다 앞장서서 뛰어가곤 했다. 엄마는 곡물을 가득 담은 보따리를  머리 위에 이고는 손도 안대고  묘기 부리듯 신기하게도 잘 걸으셨다. 시내 장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엄마는 곡물을 현금과 교환하셨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그렇지만 옛날 분들은 현금이 없으셨다. 그래서 뭔가 필요한 것이 생기면 농사지은 농산물을 시장에 가지고 나가 도매상에게 넘기고 돈을 만드셨다. 드디어 신발가게에 들어서면 나의 들뜸에 답이라도 하듯 신발 특유의 고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새 신발에서  나는 그 냄새에 설레인다.내 발보다 훨씬 큰 신방을 권하는 엄마에게 싫다고 하면 엄마의 최고 무기는 아버지한테 혼난다는 으름장이었다. 아버지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 분인줄 알기 때문에 하루종일의 설렘은 그만 사그라들어 버려서 실망하고 기분이 상해진다. 엄마의 협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죽어 가만히 있는다. 엄마의 본격적인 흥정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엄마는 주인한테 반값으로 뚝 잘라서 일방적으로 값을 들이댄다. 하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와이카노? 절대로 안되니더” 하면 “그럼 못사것다. 희야. 그냥 집에 가자”하면 주인한테 마지막 흥정의 최후 카드를 날리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안사주마 집에 안 갈끼다”하고 큰소리쳤다. 그러면 엄마는 한쪽 눈을 힐끔힐끔 껌벅거린다. 그러면 난 엄마의 작전인줄 알고 조용해진다.  그러는 사이 주인아주머니는 흥정한 가격에 신발을 팔고 엄마는 얼른 신을 담고  항상 들리는 시장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맛있는 우동을 사주시고 장을 본 후  집으로 오곤 했다.  집에 와서 운동화를 신어보면 얼마나 큰지 엄마께서 안쪽에 못 쓰는 신문지를 빡빡하게 밀어 넣고 신발에 발을 맞춘다. 신발을 신고 아버지께 보여 드리곤 했다. 명절날 신발을 신고 나서 이튿날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께서는 운동화 안에 습기 방지를 위해 신문지로 꽉 채운 뒤 높은 곳에 보관하신다.  6학년 어느 날, 명절날 외에도 운동화를 맘껏 신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학교에서 보이 스카우트 단원 모집에 보이스카우트의 정신과 활동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데 내 눈엔 복장만이 너무 멋있게 보였고 운동화를 신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만 솔깃했다. 모자와 제복, 허리 옆에 차고다니는 구명선. 윗도리에 온갖 마크 부착된 것은 마치 용감한 군인이 될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설레는지  저녁에 엄마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    그때 아마 내 기억으론 바로 위 누나가 아버지한테 설득해서 보이스카우트 가입을 허락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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