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서 생때같은 젊은이들 백오십여 명이 압사당하고 심하게 다친 사람도 그 수만큼 되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할로윈이라는 서양 축제를 즐기려고 모인 군중들이 좁은 도로에서 밀고 밀리다가 도미노처럼 넘어지면서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고로 유명(幽明)을 달리한 저 수많은 젊은이들 영전에 애도를 표하며 또 부상자들에게도 빠른 쾌차를 빌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1월을 `죽은 모든 영혼을 추모하는 달`로 하고 그 첫 날인 1일을 `만성절(萬聖節)`이라고 정했습니다. 죽은 모든 성인들을 추모하는 축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럽의 일부 국가는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정숙하게 지내는 날로 지켜졌습니다. 독일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이 날 춤이나 노래 따위를 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아일랜드를 위시한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만성절 전날을 할로윈이라 해서 코스튬을 한 아이들이 집집이 다니며 사탕이나 과자 따위를 얻어갑니다. 코스튬을 한 이유는 그렇게 해야 나쁜 귀신이 자기를 잡아가지 못한다는 속설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미국식 풍속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일부 젊은이들은 이 날을 마치 우리의 축제인 양 즐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글로벌화된 오늘날 다른 나라의 문화가 우리 생활에 들어오고 우리 것이 밖으로 전파되고 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정작 우리의 것은 뒤로 내몰리고 외래 문화가 주인 노릇을 하는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할로윈과 비견할 만한 우리나라 풍속에 제석(除夕)날이 있습니다. 제야(除夜)라고도 하지요. 한 해가 저무는 섣달 그믐날이 제야입니다. 작은설이라고도 하는 이 날 남자들은 온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고 부뚜막에 허물어진 곳이 있으면 새로 흙을 바르고 마당을 빗자루로 말끔하게 쓸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을 쓸어낸 쓰레기로 마당 한 구석에서 불을 피우는데 이는 잡귀를 불살라 없앤다는 민간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밤에는 집안 곳곳, 심지어 외양간이나 변소까지 불이 켜진 등잔불을 가져다두어 환하게 밝은 불빛 때문에 잡귀나 삿된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날은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민간에서는 이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므로 아이들은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졸면서도 내려오는 눈꺼풀을 떠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외래 유입 문화가 스며들면서 아까운 우리의 전통 문화는 뒤안길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외래문화가 원래부터 그랬던 양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할로윈도 그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 동안 코로나로 실시하던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가 느슨하게 풀리니 몇 년간 열지 못하던 온갖 행사와 축제들이 여기저기에서 한꺼번에 열립니다. 그런 행사나 축제에 코로나의 제약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다닐 자유에 취한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관계 당국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 않을까요? 누굴 탓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까운 젊음이 저리도 많이 스러지고 참척(慘慽)을 당한 그 부모들의 애간장 끊어지는 슬픔이 아프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중국 고전 「한비자(韓非子)」에 `천 길 높이의 둑도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진다(天仗之堤 潰自蟻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귀의 댓구인 `백 척이나 되는 집도 굴뚝 틈새의 불씨로 잿더미가 된다`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큰 재앙이 사소한 부주의로 인해서 생긴다는 말입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처럼 무심코 지나쳐버린 아주 작은 부주의나 불성실이 크나큰 인명 사고로 이어진 경우를 우리는 경험한 바 있습니다.  코로나가 돌기 전에도 그곳에 할로윈 행사는 있었고, 또 관계 당국이 나서서 질서 유지도 하였다고 합니다. 3년여의 사회적 격리 생활을 벗어난 젊은이들이 주 수요자가 될 축제에 예전보다 인파가 더 몰릴 것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현장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인파를 통제할 경찰 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였고 몇 번이나 구조를 요청하는 신고 전화를 받고도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해 적절하게 대응할 시기를 놓친 112 상황실 등, 이번 사건이야말로 `천장지제 궤자의혈`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질서를 유지시킬 공권력이 행사 시작 전부터 배치되어 인원을 통제시키고 주변 상가에도 협조를 구했더라면 이처럼 큰 사고를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도 지어야지요. 이제부터라도 관계 당국은 큰 제방에 생긴 작은 개미구멍이라도 꼼꼼히 살펴 그로 인한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대처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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