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신문이 영남지역에서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작가를 만나 어린 시절과 작품 성향 등을 알아보고 있다.영주시에서 태어나 예술의 풍운을 품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송재진 작가다.송 작가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머무름과 떠남, 단단함과 유연함,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평행 이미지를 석계(石溪) 시리즈에 담으면서 수채화 예술에 대한 믿음을 부풀려 가고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은? 송 작가는 영주에서 태어나 영주에서 피나는 예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도 남이 알아주기보다 자신에 심취한 영역을 확산하고 있다.취학 전 한학을 했던 부친으로부터 한글보다 먼저 천자문을 뗐을 정도였다. 어릴 때는 화가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신 뒤 중학교에 들어가 미술부 활동을 시작했다. 미술 교사로부터 20호 큰붓 사용법을 처음 배웠고 선배들로부터는 투명수채화의 맛을 알게 됐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의 바람대로 고등학교 때부터는 공부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운명처럼 중1 때 만났던 미술 교사의 화실생(화실비 면제)이 돼 다시 미술을 이어가게 됐다. 대입 예비고사 성적은 지역 예능계 지망생 중 수위였으나 대학 진학 자체가 힘들 정도의 가정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꿈은 대도시 학교로의 진학이었으나 당시 경북지역의 전기 대학으로는 안동대가 유일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예술을 접하게 된 동기 꿈꿨던 대학이 아닌 데다가 재료조차 마음껏 사서 쓸 형편이 되지 않아 대학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수창, 김인수 선생과 같은 수채화 대가들이 스승이라는 자기 위안을 만들어가며 수채화 장르에 대한 더 깊은 애착을 갖게 됐다. 유화에 비해 싼 재료 값도 수채화에 붙들리게 한 원인이 됐다. 대학 시절 스승의 화법을 전수받고자 꽤 노력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이수창 선생이 친구의 작은 유화에 대해 칭찬을 하시고는, 캔트지에 계곡을 그린 송 작가의 2절 수채화에 대해서는 “바위가 색만 입혀놓은 찐빵 같다”고 했다.송 작가는 그때 일에 대해 "은근히 칭찬을 기대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그 평가의 의미가 뚜렷이 다가왔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회상했다. 선생의 부드럽지만 적확한 일격에 이후 30여년, 게으르지만 집요하게 양감이라는 화두 속에 갇히게 됐다. 1979년 9월의 일이었다. 수채화를 예술로 접하게 된 시점이 된 것이다. 물과 바위만의 이분법적 설정. 이것이 계곡그림에 관한 한 한때의 청사진이었다. 머무름과 떠남, 단단함과 유연함,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평행 이미지를 석계 시리즈에 담으면서 수채화예술에 대한 믿음을 부풀려갔다. ◆ 작가의 작품 성향송 작가는 양감(量感)이라는 화두에 갇혀 바위에 몰두했으며, 무한의 순환을 이루는 물의 생명력이 육화(肉化)되는 과정이 수채화라고 믿었던 청사진을 실행하기에는 가벼운 투명기법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유화만큼의 묵직한 느낌, 기교보다는 필력을 내세울 수 있는 수채화를 지향하고자 재료의 확장을 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양화 물감이나 드로잉 매체를 혼용하며 기법적으로 투명과 불투명을 넘나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송 작가의 작업은 ‘수채화’라기 보다는 ‘수회(水繪)’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수회란 물을 매제로 삼는 모든 회화 장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송 작가의 작업은 투명수채를 본연으로 하되 의도적으로 수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가볍고 경쾌함보다는 터치와 양감이 존재하는 수채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2010년도에는 ‘자연’으로부터 ‘도시’로의 유턴을 꾀했다. 도시 안에서도 재개발돼 사라져가는 마을이나 골목들을 직시했다. 필생의 주제였던 석계 시리즈에서 사라져가는 골목과 집들을 주제로 한 골목 시리즈로의 전환이이뤄진 것이다. 석계가 자연에의 귀의였다면, 골목은 인위연에 대한 소회였다.  그동안 소재적 측면에서 자연(석계)과 인위연(골목), 그리고 인간(드로잉)을 다뤄 왔다면, 재료적 측면에선 수회적 확장은 유지되고 있었다. ◆ 작가 활동은 언제, 어떻게? 송 작가는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고향인 영주에 적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80년대 영주는 문화예술 불모지였고, 작품 활동은 곧 지역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더하는 일이기도 했다. 1984년, 7명의 선후배들을 끌어 모아 현재의 영주미술작가회를 창립했다. 열악했던 지역 상황에 좌절하면서도,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나약함을 지역운동으로 치환했던 것이다. 더불어 문학 친구들과의 교유도 깊어졌다. 30대 중반, 교직에 적을 둔 이후 후배들을 가르치던 공유공간이던 화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작업공간을 가지게 된 것이 더 좋았다. 더불어 지역발전의 동력이 되리라는 신념 아래 한국미협영주지부 설립을 위한 발기인 간사를 맡아 창립(1990)에 밑거름 역할을 했으며, 1998년에는 이수창, 박기태 선생을 고문으로 모시고 현 경북수채화협회 전신인 영남수채화작가회를 창립했다. ◆ 작가가 지금까지의 활동 사항 그리고 현재 송 작가는 한국미협영주지부, 한국수채화협회 등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한국미협영주지부장을 맡아 6년간 지역미술 발전을 위해 일하면서 처음으로 천 단위의 지방정부보조금을 이끌어내 영주아트파크개관기념전, 영주-목포교류전 등 여러 기획행사를 만들기도 했다.그동안 연구해오던 최초의 영주 출신 근대기 화가 권진호 유작 초대전을 영주문화관광재단과 더불어 개최하고, 김영동 평론가와 함께 세미나를 주관했다. 현재 영주에 아트랩즈음과 즈음갤러리를 개관해 기록과 창작의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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