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은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와 정의왕후의 능으로 죽엽산 아래 운악산(275m)을 주산으로 하고 같은 산줄기에 좌우언덕(岡)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였으므로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양쪽 능의 중간 아래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웠으며 앞에서 보아 좌측이 1468년에 조성한 세조의 능이고 우측이 1483년에 조성한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세조 능은 마주보는 백령산을 안산으로 삼아 좌향(坐向)을 정남향(子坐午向)으로 하였고 정의왕후는 천령산을 마주보아 우측으로 한 방위 틀어진 남서향(丑坐未向)으로 좌향을 잡았다.  세조는 평소 풍수에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왕릉지 선택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풍수고서`靑烏經`에서는 "부토자기지체(夫土者氣之體) 유토사유기(有土斯有氣)"라 하여 흙은 생기의 몸이기에 흙이 있는 곳에 곧 생기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풍수의 목적인 생기를 타기 위해선 흙에 묻혀야 하고 주위에도 흙으로 채워져야 하기에 세조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람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 그리고 묘소주위에 병풍석도 세우지마라"하여 선왕들의 능과 달리 광릉에는 석실과 석곽 대신 석회로 메워 다지는 회격(灰隔)방식으로 내부를 조성하였다.  또한 봉분주위에 둘렀던 병풍석도 없애고 병풍석에 새겨져 있던 12지신상은 묘소 둘래가 아닌 난간석의 기둥에다 새겨두었다.  주산에서 혈장까지 힘차게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그 용맥 속으로 많은 생기를 운반한다. 흐르는 생기가 왕릉 뒤쪽 입수처에 저장되어 있다가 능 내부에 있는 시신(屍身) 쪽으로 생기(地氣)를 전달하게 되는데 내광에 흙이 아닌 석물(石)이 있으면 생기전달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광릉은 횟가루를 사용하여 능 내부를 조성하였고 이 방식은 세조의 광릉을 기점으로 하여 그 후의 조선 왕릉은 대부분 석곽은 물론 병풍석마저 쓰지 않고 만들어졌다.  광릉은 입지선정 과정에서도 풍수적 이견이 있었다.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은 정인지 등에게 정흠지의 무덤 근처를 살펴보라 하였고 정인지는 정흠지 묘소 밑에 유견(兪堅)의 묘소자리가 매우 좋다고 진언하였으나 신숙주 등 다른 신하와 지관들은 정흠지의 묘소자리가 능침자리로 더 좋다고 의견을 달리했다 전한다.  단 정흠지의 묘소자리는 주혈이 단정치 못한 것이 약간의 흠이 되나 보토를 통해 충분히 비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종은 정흠지 묘소자리를 상지관(國風) 안효래, 최호원 등에게 다시 확인시키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 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세조의 광릉은 청룡과 백호가 혈장을 잘 감싸주고 혈장에는 생기를 응축시켜주는 여러 가지 혈 증`혈장오악(五嶽)과 삼성(三星)`까지 갖추고 있으며 물은 외명당에서 환포가 잘 이루어져 혈장에 많은 생기를 가두어준다.  그러므로 풍수식견이 있는 자라면 누가 보아도 명당으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에 세조의 광릉은 조선왕릉 중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과 함께 4대 명당으로 손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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