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가면 조선조 21대 영조의 둘째아들이고 22대 정조대왕의 생부인 사도세자(1735~1762)의 능이 있다.  사도세자가 처음 묻힌 장지는 원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위치한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 아래였으나 이곳이 풍수적으로 흉지라하여 화성의 현재위치로 옮겨왔고 1816년 혜경궁 홍씨가 죽자 사도세자와 합장을 했다.  이 묘소의 호칭도 처음에는 사도 묘(思悼墓)에서 수은 묘(垂恩墓)로 개칭하였다가 정조 즉위 후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키고 화성의 현 위치로 옮긴 후 현륭원(顯隆園)으로 불렀다가 고종 때 왕과 왕비에게만 붙일 수 있는 `릉`字를 붙여 융릉(隆陵)으로 격상시켰다.  이러한 호칭의 변경은 정조의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포석이란 얘기도 있다.  1776년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정조(1752~1800)가 즉위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고 선포하고 지관들에게 아버지의 묘를 이장할 길지를 찾도록 명하였다.  명당길지의 선택은 시간이 걸렸고 어느덧 정조의 나이 38세가 되도록 대를 이어갈 자손이 없었다. 왕비인 효의왕후는 무자식이고 의빈성씨에게 문효세자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정조는 풍수를 굳게 믿었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좋은 길지로 이장해야 국운이 영원히 이어진다고 생각하면서 풍수에 조애가 깊은 윤선도에게 부탁한다.  그 당시 윤선도가 왕에게 올린 상소를 보면 "신이 여러 곳을 살펴보았으나 전혀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수원의 산만은 상격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세종대왕의 영릉과 비교했을 때 조금은 못 미쳤지만 진정 천리를 가도 이러한 곳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천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땅이어서 비록 도선과 무학이 다시 나온다고 하드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소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윤강과 이원진 및 여러 지관들도 하나같이 흠이 없다고 칭찬하며 모두가 나라를 위해 축하하였습니다" 그런 후 정조 13년(1789) 7월 11일 박병원의 상소로 양주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에 옮기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정조는 친히 이장지에 참석해 산을 따라 올라가 보기도 하고 광중의 흙을 살펴보면서 황금색 진토를 확인하고 하늘이 내려준 길지라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 묘를 이장하고 1년 후 왕자(순조)가 태어났으니 이곳이 명당이란 걸 한 번 더 믿게 되었고 정조는 이곳의 산세를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글과 시를 잘 지었고 무예도 뛰어났다. 그러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된 뒤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곧 이를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정조는 즉위 후 장조의황제로 추존하였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본인도 사 후에는 부친의 곁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겨 현재 경기도 화성시 화산(108m)아래 융릉의 서쪽언덕에 묻혀있고 능호를 건릉(健陵)이라 하였으니 이 두 능을 합쳐 융·건릉(隆健陵)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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