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정(甘泉亭)은 경주시 산내면 감산리에 소재하는 밀양손씨(密陽孫氏)의 정자이다. 그곳은 산세가 웅장하여 공기가 청정하고 물이 맑아 산자수명한 명승지이다. 그래서 자고로 어진 선비들이 명리(名利)를 떠나 소란한 세상의 잡음을 피해 이곳에 우거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교화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단석산의 한 자락이 늘어져 기세가 용의 발자국과 범이 걸터앉은 형상을 하고 있다. 넓은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치하여 그 산 허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감산마을에는 밀양손씨 100여 가구가 집성문중을 이루어 단란하게 세거해오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맞은편에는 조래봉이 우뚝하고, 앞면 양지쪽에 주사봉이 궁궐처럼 수려하며, 또한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이 동북을 막아 지키고, 그 갈라져 구부러진 계곡에 근원을 둔 청정수가 많이 흘러 내려 감천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경주에서 청도로 통하는 전환의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샘은 맑고 나무는 무성하며 토질이 좋아 오곡이 잘 자라서 유족한 산촌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촌락의 사람들은 어질고 순후(淳厚)하며 행지를 바르게 하여 주위로부터 호평이 자자하다고 한다.  이 감산리에 밀양손씨가 집성문벌을 이루게 된 것은 조선조 숙종 때 서산(棲山) 손경찬(孫慶燦)공이 밀양으로부터 이거해 왔기 때문이다. 밀양손씨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밀양에서 후손이 번연하여 고대광실이 즐비한 촌락을 이루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는 대한세족(大韓勢族)이다.  서산공은 밀양손씨 거공파(巨公派)의 후예로 출생하여 부유한 가정에서 부귀를 누리며 편안하게 생활하다가 300여 년 전에 이곳 감산리에 터를 잡아 고옥(高屋)을 지어 이사를 하게 된 것은 손씨의 시조인 대수촌장이 대수부(大樹部, 혹은 牟梁)를 다스린 곳이고, 또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누대의 관면충의(冠冕忠義)로 화벌세가(華閥世家)를 이루어온 원적지(原籍地)가 신라 왕도였던 경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인근 모량리에는 대효(大孝)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공의 묘소가 있어서 후손들이 원적지에서 조상을 숭모하며 바르게 생활할 수 있도록 밀양을 떠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향조 이후 현대에 이르기 까지 밀양손씨 거공파 감산문중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해 오고 있는 문벌로 널리 알려져 오고 있다.  1979년(기미년)에 서산공의 후손인 손경출, 군하, 서하, 필하, 대달, 상규 등 예손(裔孫)이 합모(合謀)하여 마을 앞 작은 언덕에 감천정을 긍구하여 입향조의 선지(先志)와 애손지심을 기리고 추원보본과 화친 및 교화의 공간으로 이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천정에 들어서니 그 규모는 비록 웅장하지는 않았으나 손진홍공이 찬한 감천정기문이 게판되어 있었고, 정자의 안과 밖은 후손들이 선조의 유훈을 잘 간직하고자 깨끗하게 관리해오고 있어서 매우 청결하였다. 그래서 마음에 감흥이 느껴지기에 `감천정우음(甘泉亭偶吟)`이라 제(題)하여 몇 자 적어 보았다.  `준산위래계상청(峻山圍來溪常淸)하고, 긍구감정불부맹(肯構甘亭不負盟)이라`높은 산 둘러 내려 계곡 항상 맑은데, 감천정 지어 조상의 은혜 보답했네. `후손원득첨의처(後孫爰得瞻依處)하니, 화족나무화수정(華族那無花樹情)이라` 후손들이 이곳에서 선조를 추모하니, 화려한 족친 어찌 화수의 정 없겠나. `억석선지회유감(憶昔先志懷有感)하니, 추도봉심진불경(楸道奉心盡不輕)이라` 옛 조선(祖先)의 뜻 돌이켜 생각하니, 덕행 받드는 마음 가벼울 수 없다네.`송덕의효숭모의(頌德懿孝崇慕意)하니,일대유분불후황(一代遺芬不朽煌)이라` 덕과 아름다운 효도를 칭송하고 사모의 뜻 숭상하니, 한 시대의 향기로운 유업으로 영원히 빛나리라.  서산공이 후손들에게 원적지에서 자손 대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용단을 내려 이사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은 신라건국공신으로써 유리왕으로부터 손씨로 사성 받은 그 역사적인 원적지의 의미를 중요시 여긴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날은 젊은 세대들은 대체로 병원에서 태어나고 아파트에서 생활하다가 직장 따라 자주 이사를 하다 보니, 삶의 원적지에 대한 애착의 마음이 시발(始發)되지 않고, 고향 또한 없고 보면 애족심, 애기심, 애향심 등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종국에 가서는 애국심 또한 소멸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손경찬 공은 300여 년 전에 이런 시대적 변화와 변동을 미리 예견하고, 원적지에 살 수 있도록 매우 어려운 결단을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감천정은 산내면 외진 산골에 있지만, 그 골기와 장장에 현조의 유훈을 지성으로 담았다고 생각하니 정자는 고탁(高卓)하고, 감천의 유유한 맑은 물이 자손창성의 대의를 함의한 듯 더욱 청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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