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단두대에 오른 권리가 있다면 의정 단상에 오를 권리도 있다"라고 주장했던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에게는 단두대에 오를 권리만이 주어졌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질 것이라는 구즈의 기대는 그녀가 죽은 지 153년이 지난 1946년에야 이루어졌다.  지금은 상식이 되어버린 보통선거의 원칙이 세워진 것은 선진국에서도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성별뿐만 아니라 신분이나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한 표를 행사할 권리가 주어진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모든 국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다고 하지만 그 국민에서 배제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바로 스무 살 미만의 아이들이다. 혁명은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학생들이었다.  그 때 목숨을 잃은 학생들만 해도 전체 사망자의 4분의 3이 넘는다. 대학생은 22명, 고등학생이 36명, 중학생 이하가 19명이었다. 참정권도 갖지 못했던 아이들이 부정선거에 맞서 거리로 나선 것은 아이러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에게는 반장을 뽑는 투표 말고는 주어지는 것이 없다. 아직 그들은 국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든 학생들에게 모든 투표권을 허용하자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에게 정도라면 교육감을 뽑을 권리 정도는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교육에 있어서만은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가 교육감이며, 그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는 이들은 학생들이다.  많은 고등학생들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교육의 주요한 당사자인데도 정작 아무도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투표권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유관순 열사의 나이가 열일곱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며칠 전 경선에서 이겨 보수당인 공화당의 하원의원 후보가 되었다는 미국의 열일곱 살 고등학생에 대한 뉴스는 애써 외면한다.  최근 우리는 제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의무를 팽개친 어른들의 모습을 보았다. 친구를 위해 제 구명조끼를 벗어준 고등학생의 마지막 모습도 함께 보았다. 올바른 판단력은 스무 살이 되는 순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갖고 있었다면 우리는 304명의 목숨이 바다에 갇혀 목숨을 잃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아이들에게 판단력이 부족하다면 가만히 앉아 지시만 기다리는 아이들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아이들로 만드는 게 옳은 일이다.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아이들에게 교육감을 뽑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보자. 그 기회를 주기 위해 우리는 100년을 더 기다릴 것인가?  이 종 훈경주시 황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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