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일의 역사다. 하루의 시간은 거듭되지만 결코 복사되지 않는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의 속성은 일정한 보폭이지만 그 내면의 상황은 무수히 다양하다. 아무리 하찮은 그 무엇도 시간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견고하고 완벽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일생을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생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몰의 사이에 모든 하루가 있다. 생은 과정이 중요하고, 몰은 그 순간이 중요하다. 왜 태어났는가의 답은 없지만 어떻게 사는가의 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누구나 죽을 수는 있지만 왜 죽어야하는지에는 분명한 사유가 존재한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한다는 뜻에 의외는 없다. 죽음이 타인에 의한 불행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요즘처럼 우리나라 전 국민이 한 사건에 오롯이 정신을 빼앗긴 적도 드물 것이다. 외신(外信)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전후의 근대에 이런 참혹함과 무력감을 겪지 않았다. 삼풍백화점이 한 달 넘도록 무너지지 않았고, 지하철의 불도 한 달 이상 타진 않았다. 최근에 중앙일간지에 쓴 내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언젠가, 사람들은 달에도 다녀왔다. (중략)사람이 갈 수 없는 이승이 있는 줄 몰랐다. 아직도 붕괴가 진행 중인 바닷 속 세월이다. 그 곳은 저승이 아닌 이승이다. 더구나 지금은 21세기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설마 인재가 아니길 바랐다. 결국 인재였다. 그리고 온통 분노로 들끓는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고 존엄하다. 그 중에서도 매일 밤 키가 자라고, 매일 낮 살이 부푸는, 한 그루 푸른 수목의 청소년은 더욱 소중한 존재다. 한 생명과 연계된 혈육은 대게 줄잡아 서른 명에서 오십 명 이상일 것이다. 결코 한 생의 죽음에 머무르지 않은 무한의 슬픔이다. 우리는 수백의 생명이 불가항력으로 맞이하는 생몰의 임계점을, 불가피한 시선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꽃봉오리 심장을 가진 아이들과, 저마다 삶의 의미를 지녔던 어른들이 겪었을 공포와 고통의 마지막을, 상상할 수 없으면서도 지속적 상상을 하게 된다. 집단의 죽음 앞에서 집단적 무력감은 차라리 가슴 따뜻한 공감의 능력이다.  이제 국기 앞이 아니어도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을 차례다. 나는 얼마나 정직한 국민인가, 국가의 발전과 안녕에 무엇을 기여했는가, 한 시대의 공동체로서 사회에 대한 건강한 공감대는 무엇인가. 돈과 힘을 가진 자를 뒤쫓던 물신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한다. 정신세계의 행복은 외부의 가진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임을 깊이 느껴야 한다. 대다수 사람들의 노후는 비슷한 그림이다. 아담한 전원주택에서 텃밭이나 일구며 소박하게 사는 것. 가끔 멀리서 오는 친지나 자식과 손주들을 맞아 타는 노을 아래 둘러앉아 한 끼 밥을 먹는 것. 그 때 필요한 것은 농사 지을 건강한 육신이며, 친지와 혈육과 타는 노을을 바라볼 맑은 눈이며, 잘 먹고 잘 쌀 튼튼한 장이다. 빌딩이나 몇 채의 집이 건강을 대신하지 못하며, 승승장구 출세의 추억이 맑은 눈을 대신하지 않으며, 몇 개의 은행통장이 튼튼한 장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생의 마지막 몰의 순간에 그 무엇도 가지지 않고 떠난다. 피터지게 얻은 명예도, 더 높은 부동산과 더 무거운 통장이 부러웠던 갈증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애초 내 것이 없었으니 끝내도 빈 손임은 너무 당연하다. 이런 범부의 사회통념을 요약한 "남에게 아쉬운 손 내밀 정도만 아닌", 딱 그 정도라야 몸도 정신도 건강히 지킨다. 이 화 리  소 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