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생인 나에게 올해 갑오년은 유별하다. 굳이 손가락으로 세지 않아도 한 손 안에 다 잡히지 않는 나이다. 수년전부터 새치염색과 더불어 간간이 풍치를 앓고 있다. 나이 듦이란 윤기 나던 검정머리칼과 단단하던 치아를 하나씩 잃어버리는 과정이다. 어린 날 실없던 머리칼 걸기싸움에서 늘 이겼던 튼튼한 모발이 잘도 끊어진다. 불의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던 하나뿐인 머리통 대신 백발이 한 올 한 올 백서를 쓰는 것이다.  세계 최강의 강철보다 더 오래 버텨줄 듯 믿었던 치아를 잃을 때마다 말이 헐거워진다. 정의롭지 못한 말을 뱉었던 하나 뿐인 혀 대신 치아가 제물로 바쳐진다. 죽어서도 오래 남는 머리칼과 치아, 나의 증명을 잃는 건 나이의 값을 치르는 것이다.  흰머리가 외상으로 먹은 나이의 장부처럼 날로 불어날 줄 몰랐다. 떡하니 자랑삼아 이자까지 얹어 갚아줄 인생이 아니어서 일단 감추기 바쁘다. 한 달에 한두 번 가자미눈을 치뜨는 염색을 하며 살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며칠 전 앨범을 정리하며 초등학교 소풍에서 찍은 단체사진들을 유심히 보았다.  흑백사진이어서 더욱 검은 단발머리는 자르르한 윤기를 왕관처럼 두르고 있었다. 숱도 유난히 많아 한웅큼으로 잡기 어려웠고, 심지어 가발이냐고 지나는 사람이 당겨보는 일도 있었다. 그 좋았던 시절이 마냥인 줄 알았다.  가만두어도 달빛 아래 검은 물결처럼 출렁이던 머릿결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변덕을 부리느라 화학약물인 파마로 주리를 비트는 고문으로 숱하게 괴롭혔다. 지금은 아직 살아있는 흰 머리카락이 미워서 사약 같은 염색약을 물고문 하듯 억지로 먹인다. 그런 구박에도 이 정도 견뎌 준 게 미안하고 고맙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저 좋았는데 이제 바람 부는 날이 두렵다. 겁 없이 먹은 외상장부를 들추며 독촉하듯 착착 넘어가는 머리칼이 난감하다. 암튼 나처럼 변변찮은 사람과 변변해도 더 변변해지려는 사람들의 욕망으로 염색약이 개발되었다. 일단 변장이 되어 한 달 중 며칠은 다행이다.  엄연히 신체의 일부인 치아를 여기저기 치과에서 세 개나 버렸다. 앓던 이 버리는 일에 누군들 숙연한 이별을 할까.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후련하면서도 휑한 입속의 생경함에만 신경이 쓰였다. 충치를 앓은 적 없어 외형이 말짱했던 나의 이는 치과의 쓰레기통에서 쓸쓸히 식어갔을 것이다. 지금 나의 일부였던 세 개의 이는 서로 만날 수조차 없다. 혹여 더 좋은 치과를 바라는 욕심으로 각기 다른 장소에 버렸다. 그립다. 한 번도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한 나의 일부, 나의 것들. 아득한 유아기에 옹알이 연습처럼 유치가 돋고, 제법 말이 여물어질 때 영구치가 돋는다.  오십 년이 넘도록 옹기종기 모여 내 입속에서 어깨동무로 다정했던 것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놓지 않으려고 옥죄듯 얼마나 굳은 의지였던가. 에너지가 고갈되면 생명은 끝난다. 별 대수롭지 않은 나의 목숨을 연장하느라 치아는 숱한 고난을 씹어댔을 것이다. 우리의 몸을 시계에 비유한다면 치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의 톱니다. 잡식성인 인간의 무한한 식욕 앞에서 갑년의 치아는 이제 망연한 통증으로 제 말을 한다. 망가진 톱니처럼 어긋나는 나의 기대는 늘 치아에게 원망만 보탰다.   달아나는 검정머리칼도 어금니 몇 개도 다 나이의 값을 치르는 중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이가 내 것인 줄 알고 맨 날 공짜로 주워 먹었다. 이제야 세상이 보낸 청구서가 보인다. 이 화 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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