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문을 무척 좋아한다. 어떤 아쉬움을 비유할 때 신문 한 장 읽는 것만도 못하다, 는 말이 절로 나온다. 거의 정독에 가까운 신문읽기가 사십 여년 되었다. 아마 생의 마지막까지 건강이 허락한다면 이 습관은 계속될 것이다. 오래 전 중앙의 한 일간지 창간주주가 되어 주변에 구독을 권한 적이 있다. 티브이 뉴스만으로 충분하다거나, 인터넷으로 본다고들 했다. 아무런 수고로움 없이 듣는 방송의 특성은 간략한 상황 전달에 그친다. 인터넷 검색도 대충 원하는 특정 면만 읽게 되는 편리성이다.  그런 이들의 특성은 조금 알고 다 아는 듯 행동한다. 조금 세부적인 내용에 접근하면 골치가 아프다거나, 다 그런 거지 뭐, 라며 얼버무린다. 시시콜콜 알면 뭐하냐는 체념주의자나,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방관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주로 나쁜 상황 앞에서는 무지막지 덤빈다. 한 귀로 흘려듣거나 대충 본 설익은 정보만으로 세상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다. 한 두 마디의 욕으로 대변되는 결론은 얼핏 쉽고 간결해서 쉽게 동의를 얻기도 한다. 실은 무지에서 나오는 자기방어임을 눈치 채는 사람은 드물다.  매일 두툼한 신문을 손에 드는 순간 나도 세상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면면마다의 알찬 활자들을 읽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앎의 기쁨을 얻는다. 그래서 장기간 외국여행 시에도 현지로 신문구독을 요청했다. 말은 사라지지만 활자는 천년을 버틴다. 이런 관점에서라도 신문은 현대사회의 역사성에 구심점 역할을 한다. 고 천상병시인은 삶을 "이 세상 잠시 소풍"이라고 했다. 시는 그냥 시일 뿐, 그저 그냥 놀이처럼 살다 갈 순 없는 것 아닌가.  프랑스 언론에 "세계에서 신문을 가장 좋아하는 한국남성"이라 칭한 적이 있다. 여행 간 외국의 호텔에서 눈을 뜨면 한국의 신문부터 찾는다고 했다. 물론 인터넷과 모바일이 일반화하기 전이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실소했다. 여행가방에 몇 권의 책을 필수품처럼 챙기는 구미의 남자들이다. 드물게 독서하지 않는 한국의 성인남성들은 몰랐을 것이다. 한 때 이토록 사랑 받던 소중한 종이신문의 생명이 얼마나 오래 남을 지는 의문이다.  신문은 방송의 뉴스처럼 단순한 정보전달의 역할이 아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세계정세 등 각 분야마다 깊이 다룬 기사가 있다. 이 외에도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 국내외의 석학과 예술인 등의 칼럼으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신뢰할 수 있는 신문만 제대로 읽어도 매일 몇 개의 특강을 안방에서 조용히 공부하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신문구독료를 친구와의 만남에 비유한다. 한 달에 한 번 소중한 벗을 만나 밥 한 끼 먹는, 기껏 그 정도의 돈이다. 한 달 내내 내가 얻은 지식에 비해 너무 싼 수강료다.  소도시에 불과한 경주의 주간신문이 불만이었다. 배부를 때 받는 밥상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대다수 이미 지난 일들을 전달하기에 뉴스페이퍼로 읽히지 않았다. 소도시가 갖는 한계로 소식지 이상의 의미를 그다지 갖지 못했다. 이제 경주 유일 일간지 경도일보가 경상북도를 아우르는 '경북신문'으로 거듭 났다. 우리나라 종이수입은 거의 100%에 이른다. 단순히 사건사고나 갖가지 행사 알림 정도로는 지식을 전달하는 귀중한 매체로 남기 어렵다.  세상 어느 친구보다 든든한 멘토의 역할을 '경북신문'에서 기대해 본다. 늘 책임감과 균형감각을 잊지 않는 언론은 한 시대의 사회기여다. 언론의 목적성이 신뢰와 정직에 있는 것은 올바른 사회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끝으로 귀사의 커다란 발전과 늘 보고 싶은 언론이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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