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비가 지겹지 않을 정도로 내리다 그쳤다. 이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불쾌감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름은 싱싱한 녹음의 싱그러움을 주는 한편 며칠씩 인내심을 시험한다.  이 비 그치면 푸른 하늘과 환한 햇살을 볼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 견딘다. 우리 인간도 양지지향의 자연생명이다. 비록 뜨겁더라도 음지보다 밝음이 좋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을 반성하게 하는 푸른 하늘이다.   익숙히 보아오던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청문회란 치밀한 검증에 정직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관행'처럼 변명과 거짓이 예사롭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여야의 역할은 역지사지를 잊게 만든다. 보수는 늘 야당을 원망하고, 진보는 늘 여당을 손가락질한다.  이건 잘못된 게 아니다. 그래야 한다. 그래서 의회민주주의가 있는 것이다. 견제세력이 없으면 독재가 된다. 비판세력이 없으면 오류를 범한다. 서로의 입장이 바뀌었을 때를 잊지 않는다면 이건 지극히 타당한 공식이다.  서로의 견해차는 인간이 무리와 무리를 이루면서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원시시대에도 부족을 대표하는 자가 있어서 제 뜻을 관철하고자 치열한 공방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타부타 여러 의견을 거쳐 하나의 결론에 합의해야 무리는 무리로 남을 수 있다. 강아지 가족을 키워보면 서로 제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 미물들도 서로의 성격이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누구는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망했다지만 파벌끼리니까 싸운다. 정치판 싸움은 극히 정상적인 표출이다. 고인 물이 썩듯이, 좀 더 역동적인, 건강히 구비치는 역사라야 맑아진다. 우리는 북한처럼 단일체제가 아니다.  오로지 노동당 하나 뿐인 그 곳은 온통 박수소리만 요란하다. 꽉 다문 입매로 매사 오케이다. 그러니 나라꼴이 그 모양이다. 획일화된 체제에서는 어떤 희망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침묵의 동조를 강요하는 체제에서 비판 없는 국정은 정의를 배반한다.  월드컵의 축구경기에서도 반칙에는 노란카드가 등장한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면 퇴장의 붉은 카드를 받게 된다. 한 국가의 특정분야를 책임 질 대표를 선정하는데 검증의 과정은 청문이다. 관중석의 예리한 눈빛처럼 국민들의 감시 또한 치우침이 없어야한다.  내 편이라고 무턱대고 관대해지는 것도 반칙이다. 프랑스의 어느 시장은 출장비에서 남은 숙박비 5만 여원을 누락시켰다가 사임을 했다. 수치가 명예에 우선한 것이다.  좋은 게 좋다. 이 두루뭉수리 문화는 위험한 도덕성을 예고한다. 원칙을 벗어난 비도덕까지 용인하는 것은 국가의 청렴성을 위해한다. 세월호의 여파에서 봤듯이 사회전반이 반칙이라서 이 참사가 국치임을 부정할 수 없다.  죄 없이 생떼 같은 죽음을 맞은 어린 생명들을 보낸 일을 잊지 않아야한다. 나라를 부끄럽게 만드는 건 모든 국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참회해야 한다. 뉘우치기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3류 국가가 되고 후진국민이다.  애국이란 만주벌판의 항일투쟁처럼 거룩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르게 살면 된다. 거짓에는 선의도 있을 수 있다.  가능한 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애국이다. 불가피한 거짓조차 거듭 성찰해보아야 일등국민이 된다.  그래야 청문회를 향해 뜨끔한 똥침을 날릴 자격이 된다. 국민수준이 정치수준임을 안 영리한 정치인들이 그래서 생쇼를 예사로 하는 것이다. 법원에 걸린 디케의 저울에 우리들 스스로 먼저 올라앉아 정의의 심판을 받는 일이 애국이다. 이 화 리소 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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