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다. 드높다. 사계의 하늘 중 가을의 하늘이 으뜸이다. 계절의 시작인 봄은 하늘보다 땅으로 시선을 내리게 한다. 새 봄에 아주 작은 움들이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은 인간의 탄생과도 흡사하다. 새싹은 아직 무엇 하나 제 형체를 잡지 않아 미약한 기운으로 어리둥절하다. 봄이 무르익으면 꽃과 열매는 제 몫의 시간으로 분주하다. 마치 청소년들이 학업에 열중하듯 그렇게 서툴고 바쁘다. 여름은 땅도, 물도, 하늘도 모두 역동적이다. 수목은 팽팽히 부풀고, 봄부터 구름이 머금었던 빗물을 급히 솟아내고, 하늘은 덩달아 흥분하여 번개로 찢어지곤 한다. 누구보다 큰 꿈을 꾸고, 서로 앞서 가려 서두르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실의에 절망하는 청년기가 그렇다. 그래도 당찬 여름은 꽃을 만개하고 열매들은 한껏 부풀어 향과 맛을 간직한다. 청년이 되어 정체성의 자아가 형성되면서 사회의 전반을 체험하듯 그렇게. 더운 듯 덥지 않고, 추운 듯 춥지 않은 이 초가을의 하늘은 감성이기보다 이성적이다. 급히 따먹을 수 없는 가을 열매를 알맞게 익히고, 녹음이 다 한 잎은 그 성질에 따라 붉고 노랗게 물든다. 이 질서는 중년의 가장이 자식들 특성에 맞춰 다양한 교육을 시키는 것과 닮았다. 가을 햇살은 들판의 곡식들이 적절한 온도와 습도로 참맛을 간직하도록 정성스럽다. 넘실대는 나락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은 젊은 날의 갈등보다 순하지만 중년부부가 나란히 세파를 견디는 모습이다. 막바지에 이른 가을은 거둘 것은 거두고 버릴 것은 버린다. 장년이 되어 수많은 굴곡을 헤쳐 나온 자신의 삶을 자성하듯 그렇게. 늦가을의 거둠은 생성된 봄여름의 결정이며 겨울나기의 준비이고, 버림은 과유불급의 진리를 따른다. 한 때의 낭만, 한 때의 청춘, 그 모든 것들이 삶의 경륜으로 빛나며, 가벼워진 생의 소멸을 각오하는 장년이다. 겨울은 세 계절의 시간을 되새김하느라 천천히 가는 시계다. 무엇을 하거나 무엇이 되기보다 남은 것들을 보존하는 노년의 능동성이다. 겨울의 시린 냉기는 땅심을 단련시키고, 건기의 앙상함은 결핍의 미학이다. 노년의 인내심과 근검절약의 습관은 봄 같은 아이들의 귀감이 된다. 마지막인 겨울이 존재하지 않으면 봄의 시작도 없다. 어버이의 어버이가 없으면 오늘의 내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사계 중에 어느 계절이든 다 소중한 시절이다. 탄생의 봄, 성장의 여름, 성숙의 가을, 마지막 겨울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우주의 순환이다. 그 중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계절이 가을이다. 누구나 가을이면 하늘을 우러른다. 저 푸른 가을하늘이 아무 이유 없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 생의 절정은 청년이 아니라 중장년이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모든 깨달음이 종합적 체득이 된 중장년이야말로 세상의 밑거름이다. 청소년기의 실패나 후회, 노년의 체념과 달리 중장년의 인격은 완성된 견고함이다. 흔들리지 않는 중장년의 꼿꼿함이 장대처럼 일어서서 하늘을 드높이고 있다. 동토의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은 두루 바쁜 계절이다. 바람이 내린 씨앗들을 흙 속에 갈무리하고, 우주와 사람이 함께 땀 흘린 한해살이 곡식을 거두고, 푸르른 잎들과 생이별이 아파서 붉고 노란 옷 한 벌씩 일일이 해 입히고, 달고 향기 나는 과실들을 하늘에게 먼저 한 입 선물하는 예의도 지킨다. 그래서 가을하늘은 푸르고 드높은 자존심으로 창창하다.  이 화 리소 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