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쉽게 자주 오랫동안 들어오던 말이다. 한 때 '통일'이란 낱말을 입에 올리는 자체가 불법인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리 만만치 않은 단어로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언제까지 뜨겁다는 핑계로 바라만 볼 수 없다. 1)두 개 이상을 몰아서 하나로 만듦. 2)다양한 어떤 요소가 합치하여 하나의 전체가 같이 소속하는 관계. 국어사전의 통일에 대한 풀이다. 묘하게도 사전적 의미 역시 1번은 참 단순하고 쉽다. 2번은 구체적이며 개념의 학문적 분석이 필요할 정도로 정의(定義)한다.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질적 체제 아래서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된 지 너무 오래다. 우리라는 동질의 민족성 이외에 달리 찾아볼 동의어가 없다. 분단은 완강한 현실이고 서로가 완고한 이념에 놓여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뼛속까지 침잠한 이념의 늪이다. 늪에서 쉬 걸어 나올 재주는 없다. 자칫하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이 늪의 특징이다. 우리가 통일에 앞서 대비시키는 서독의 경우 분단 이후 줄곧 어마어마한 통일기금을 축적해왔고, 우리처럼 극한의 적대감도 없었다. 분단을 빌미로 반공의 정권을 유지한 적도 없으며, 가난한 동독을 무시하는 우월감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통일이 되자 독일의 경제는 휘청거렸고, 드물게 이성적인 서독국민들이 동요했다. 혼란의 책임을 동독인에게 씌울 수밖에 없었다. 떼로 몰려 든 거지일 수밖에 없는 많은 동독인들이 극심한 상처에 시달렸고 아직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1, 2차 대전을 겪은 독일인들의 검소함과 절약정신은 세계인들 중에서도 유별하다. 이들은 졸부를 부러워하지 않고, 우리처럼 문어발식의 대기업도 없으며, 자손 대대로 부를 누리겠다는 가족승계도 손가락질 대상이다. 명품에 눈독이 오르는 천박함을 멸시하며 이웃의 가난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국민이었다. 이런 지성이 어른에서 아이까지 유전처럼 내려오던 서독국민들의 인격까지 흔든 것이 통일이다. 얼마 전 북한의 김정은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안 보이자 남한국민들이 겁을 먹었다. 행여 어떤 붕괴로 헐벗은 북한주민(남한은 국민, 북한은 주민이라 칭하는 것도 교묘한 타산에서 나온 차별)들이 떼거지로 몰려올까봐. 물론 우스개로 떠도는 말이지만 이 말이 내포한 진실성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준비 없는 이별'이란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다. 청춘의 한 때, 잠시의 사랑에 따른 이별에도 준비가 없으면 혼란의 상처가 깊다. 통일 자체는 1번의 예처럼 단순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국가와 국가 간의 혼재에는 전후의 시간과 기금과 수많은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상처를 주는 쪽의 오만함도, 상처를 받는 쪽의 비참함도 줄이기 위한 것이 시간이다. 두 개의 분단국가는 쉽게 단 냄비나 쉽게 식은 냄비가 아니다. 가장 우선되는 것이 어느 한 쪽의 체제를 따르는 흡수의 상태다. 무력을 제외한 평화적 흡수통일이 아니면 1국가 2체제의 연합적 공동체다. 후자는 시시콜콜 사회전반의 복잡한 규정을 합의하느라 긴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설혹 정치지도자들의 합의를 통과한다고 양국의 전국민적 합의까지 이끌어내지 못한다. 가장 쉬운 예는 현재 우리의 지역감정의 골이다. 사실은 골짜기 정도가 아니라 아주 깊고 캄캄한 협곡의 수준이다. 전라도와 냄새나는 홍어를 빗댄, '홍라리언'이라는 특정 인종으로 칭하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악랄한 야유를 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IT강국이다. 온 세계가 스마트 폰의 드래그 한 번에 오가는 21세기에 유독 이런 천민의식만은 개선되지 않고 대물림된다. 현재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폭언과 폭력과 저임금 등의 차별을 훨씬 능가할 이기적인 잔인함이 우리 속에 있다. 이런 남한의 특성이 북한주민과 무난한 융화를 가지리라는 희망은 금물이다. 이건 남과 북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절망이다.
이 화 리소 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