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배상(配喪)을 당했다. 삼년 전에 발견된 중환을 치유하기 하기 위해 현대의학의 최신의료처방을 받으며 막대한 치료비를 아낌없이 감당하는 모습을 보고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남편의 아내에 대한 애명(愛命)을 다하는 것을 보고 감천의 특효를 모두 기원했다. 특히 명문가에 고이 자라 이씨(李氏) 가문에 시집와서 삼형제를 낳아 모두 명문대학교에 입학시켰고 미국 유학을 보내서 출중한 인재로 키워 시댁의 번창을 이룩하였으며, 사대봉제사를 진성으로 받들면서 시어머니를 잘 시봉(侍奉)하여 백수(白壽) 가까이 모시면서 위부지도(爲婦之道)를 다하신 분이었다. 특히 친정아버님의 교훈을 명심하여 부창부수를 몸소 실천한 여사이기에 보상의 여생을 받지 못한 체 이승을 떠나셨기에 지인들은 모두 애통해하였다.    빈소에 묵념하고 눈물에 부풀은 친구 앞에 절하며 "고분지통(叩盆之痛)에 얼마나 당혹(當惑)하십니까?" 조문하였더니, 그 때 이외에도  "있을 때 잘해"라고 주시하면서 힘주어 답언을 하였다. '있을 때 잘해'라는 이 말은 항간에 유행하였던 노래 말인데, 그 말은 아내를 저승으로 떠나보내고 금실의 종별에서 느낀 반성어로서 아내의 소중함을 극명하게 나타낸 함축성 메시지라 생각되었다. 부부로 만나 함께 생활해오는 과정에 근검절약하다보니 정서적·물질적으로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본의 아니게 다하지 못해서 가끔 미안스럽게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어느 목표시점에 도달하면 잘 해준다고 다짐을 하며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며 사는 것이 일반적인 삶인데, 그 긴 인내의 소목적 세월이 뜻밖의 허망한 사별을 만나면 어찌 후회로 남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조장지처(糟糠之妻)는 불하당(不下堂)이라는 지불유예의 말이 있어온 것이며, 아내의 사별을 고분지통과 비도산고(悲悼産苦)라 하지 않았던가. 이는 북을 두드리며 후회하는 고통이요 출산의 고통과 같이 아프다 하였으니,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라'는 당부였던 것 같다. 고통은 괴로움과 아픔이다. 고통에도 농도가 있다. 농도가 진할수록 그 괴로움과 아픔은 큰 것이다. 가장 큰 고통은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고통이다. 그것을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으로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한다.  하늘이 무너지면 이 세상은 끝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의 극대치이다.  그 다음의 고통은 붕성지통(崩城之痛)이다. 성이 붕괴되는 고통으로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고통을 비유한 것이다. 성은 생명을 보호해 주고 의지하게 하는 튼튼하게 쌓은 긴 장벽이다.  그 장벽인 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고통을 장자의 설화에 나오는 고분지통이라 하였다.  자식이 세상을 떠나면 그 고통을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 하였다.  자하(子夏)가 자식을 잃고 실명(失明)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고통은 대명천지를 볼 수 없는 불가시의 암흑고통이다. 그 다음은 형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고통이다. 이 고통은 신체의 반을 베어낸 고통으로 할반지통(割半之痛)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상별(喪別)과 관계된 고통을 그 대상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였다. 그래서 조문할 때도, '천붕지통에 얼마나 슬퍼하십니까!', '붕성지통에 얼마나 암담하십니까!', '고분지통에 얼마나 당혹하십니까!', '상명지통에 얼마나 마음 아프십니까!', '할반지통에 얼마나 슬프십니까!'라는 위로의 차별적 말을 하였던 것이다. 세모가 가까워지고 있다. 새해가 온다는 기쁨도 있지만 한 해를 보내면서 괴로움과 아픔으로 어렵게 사는 이웃에게 이런 네 가지의 큰 공통만은 없도록 기원하면서 '있을 때 잘 해'라는 좋은 말씀을 전해 본다.
김 영 호교육학박사사단법인 경주사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