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서 퇴직한 후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가정과 사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안일을 버리고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묘우와 생활의 곤궁함과 육신의 고통을 참으며 어버이와 지아비를 섬긴 효자·열녀의 정려비를 살펴보았다.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 귀한하여 전원에서 학문에 심취하여 진리를 규명하고 후학을 가르쳐서 출사시킨 대유학자를 모신 서원과 서당 등을 보기도 하였다.  어떤 곳은 국비를 조보 받아 수즙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고, 어떤 곳은 자손들이 힘을 모아 증축까지 하여 조상의 업적을 현창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런 곳은 후손들이 조상의 유업을 잘 계승하여 부와 귀를 함께 이룩하여 사회적 명망과 세력을 구유한 문중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귀중한 목숨을 나라 위해 바친 위대한 충신인데도 불구하고 자손들이 불출하여 허물어진 사당의 방기한 모습을 볼 때는 부끄럽기도 하였다.  낳아 길러주신 어버이의 구로지은을 잊지 못해 보본의 효의를 다한 정려 효자각이며, 지아비를 위해 목숨 바친 열녀들의 정절을 표상한 열녀각을 대할 때, 충효열은 목숨을 초월하는 지고의 초인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아진다.  그렇기에 백제의 충신 성충은 의자왕과 권신들이 음황과 탐락으로 매일 같이 향연에 빠져 정치가 부패하고 전쟁과 토목공사로 국력소모가 또한 과대하여 나라 사정이 국민들의 걱정의 대상이 되었으나 치자는 이것을 무시하고 격한 권력투쟁으로 망국의 징조가 보였을 때 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른 정치를 위해 직간하였던 것이 아닐까. 결국 성충은 그로인해 왕의 노여움을 받고 옥중에 갇혀 굶어 죽게 되었지만,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구국을 위한 글을 올렸던 것이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은 것이니 한 말씀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변천을 살펴 보건데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릇 용병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하여 상류에서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이 침략해오면 육로에서는 침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이 험애한 곳에 거하여 방어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진충의 말을 남기고 죽었던 것이다.  '새는 죽음에 그 울음이 구슬프고, 사람은 죽음에 그 말이 착하다'고 하였던가. 의자왕은 성충의 착한 충언을 외면하여, 끝내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백제는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원년에 거란군이 침입하였을 때 행영도통사로 임명되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싸우다가 통주에서 사로잡힌 강조는 거란왕이 "네가 내 신하가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강조는 "나는 고려인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냐"결연히 대답했다. 거듭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거란왕의 신하가 된다면 살려 주겠다는 물음이었으나 강조는 고려인으로서의 절개를 지키다가 참살을 당했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에서 발견되는 지난 역사이지만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감명을 주는 내용이다.   충신의 말이 비록 정서적 불편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 직간이 대업을 걱정한 중심의 방안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였더라면, 측근에서 고하는 실세들의 잘못된 간언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개인적인 영달을 목적으로 역사에 남는 간신배가 되기보다는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성충의 충언을 가슴에 담고 올바른 가버런스(goverance)가 될 수 있도록 충직한 진언을 할 수 있는 통치자의 측근이 많았다면 국가 사회는 국민의 신뢰를 받고 발전을 하였을 것으로 사료되며, 강조가 참살을 눈앞에 두고도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충의 또한 삶의 가치를 명증하는 사례라 생각된다. 이런 사실에 주목해 볼 때 특히 국가기관에서 책임 있는 임무를 수행하는 복무자는 권력과 부에 포커스를 맞추고 부정과 간신적 접근을 시도하기 보다는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바치고 숱한 현실적 고통을 감내한 지난 시대의 충효열의 위대한 보국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근무하는 것에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며 '임금은 충신을 죽었지만 충신은 임금을 잊지 않으며 영원이 산다'는 역사적 교훈과 죽임을 당하더라도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사례는 지난시대가 후대에게 전해주는 유통기한이 없는 위민교훈이라 생각된다.
김 영 호
교육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