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대하는 사람마다 마음은 각각이다. 근래에 들어 명절증후군이라는 신종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에게 명절이란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런 부모님을 뵈어야하는 젊은 부모들에게 명절은 고난의 시험장이다. 아이들에게 명절이란 의외의 용돈과 직결된다. 이렇게 사람의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명절은 왜 필요했을까? 단순히 관습에 따라 이어져 내려오는 명절은 필요불가결한 것일까? 동양의 명절에 버금가는 서양의 축일도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와 부활절 등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이 특별함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명절의 가장 근원적인 주체는 가족모임이다. 동양에서는 떨어져 살던 가족과 친족끼리의 만남에서 효성과 우애, 관계의 척도를 확인한다. 거기에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영혼이 된 조상에 대한 모심이다. 여럿이 모여 가장 귀하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직계후손의 격식을 갖춘 뒤 나눠먹음으로 혈연의 연계성을 확인한다. 현대에 와서 명절의 문제점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대다수 여자들이 안사람의 위치에 있지 않고,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사회구성원이 되어있다. 의식주의 모든 일상사는 편의를 위해 단순화되고 축소되어 버렸다. 관습은 탄탄한 역사성을 띄어 변화를 따르지 못한다. 변화하지 못하는 오래된 시간과 첨단의 미래지향은 충돌한다. 단지 명절만 아니라 일 년에 몇 번 치르는 제사도 문제가 된다. 알기도 하고, 또는 기억에도 없는 사자(死者)를 위해 적어도 이틀쯤의 시간과 노동을 제공해야하는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성적에 쫓기는 아이들은 서서히 제외대상이 되어간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시점에서 제사는 다시 고려되는 문화로 변모할 것이다. 첨단의 과학적 데이터와 실체적 결과만이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경쟁적 현실이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관습의 친목보다 개인의 시간이 성공의 활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밑그림이 지금도 분명히 보인다. 유럽에도 애어른 구분 없이 가족 모두가 모여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추도하는 관습이 있다. 평소 종교에 무심하던 사람도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일 년 중 유일하게 교회에 가고, 조상의 묘소에 촛불을 켠다. 공동묘지의 개념이 우리와 달리 마을의 공원쯤에 위치해서 가능한 일이며, 묘지는 아름다운 화원의 분위기다. 서양인들을 조상도 몰라보는 '호로자식'쯤으로 치부하는 건 큰 오산이다. 주로 낮은 구릉에 위치한 묘지에는 사람들의 물결과 수많은 촛불로 거대한 연회장처럼 반짝인다. 겨울밤의 한기에도 아랑곳없이 이들은 조상에 대한 추억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숙연해진다. 서구에는 우리들처럼 야단스럽게 음식장만을 하는 제사문화가 없는 대신 직계가족의 기일에 모여 추도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명절인 크리스마스이브의 문화는 가족과 친족을 더불어 주변의 모든 지인에게 열려있다. 11월이 되면 한 달 내내 편지를 쓰느라 온 가족이 분주하다. 멀리 사는 부모형제, 친척, 그리고 은사님이나 친구, 지인들에게 일 년 동안 자신들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시시콜콜 적어 보낸다. 장년의 나이에 심지어 초등선생님께도 안부를 묻고, 자신의 소식을 보내는 일은 어려서부터 해마다 행해진 습관 때문이다. 간혹 여럿이 모인 가족관계의 불협화음이 확대되어 불미스런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런 사고의 수치는 늘 아주 미약한 집계일 뿐 옥신각신 다툼이 있어도 화해할 수밖에 없는 큰 틀의 숙명적 관계가 가족이다. 예를 들어 추석에 삐끗했던 관계가 설의 만남으로 희석되어 유야무야되는 것이 명절의 분위기다. 서로 오가며 시간을 주고받지 않으면 단절되는 것이 관계다. 피로 맺어진 인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타자와의 인연으로 모든 생명체는 존재한다. 서로 다르지만 가족관계의 우위는 없다. 슬기롭게 변화하는 새로운 명절이 기다려진다.이 화 리소설가·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