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 자락 끝에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선생께서 어린 시절 공부한 독서당讀書堂에 간다. 배반네거리 굴다리 지나 서라벌대로 오른쪽 산자락에 조그맣게 얼굴 내민 독서당! 경주에 살면서 집 가까이 있는데도 그냥 지나치고, 찾지 못했던 독서당! 오늘은 봄 햇볕을 동무삼아 독서당 가는 계단을 오른다. 청청한 푸른 대숲에 빙 둘러 쌓인 곳, 아, 좋은 곳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의 맑은 바람소리가 고운 선생의 절개를 상징하는가, 오랫동안 사람손이 안간 것 같은 낡은 기왓집과 고운선생 유허비, 그 유명한 최치원선생의 유적들이 이렇게 폐허처럼 버려져야 하는가? 마음 한구석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얼마 전 뉴스를 보니, 고운선생이 당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했던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시에는 '최치원 기념관'이 건립되고 올해 1월, 양저우 당 서기가 서울을 방문해 '최치원'을 가교로 한중韓中 우호협력을 펼치자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는데…(최치원의 위상은 중국에서 이렇게 더 유명한데)… 경주에도 '중국인 관광객'이 해마다 더 많이 밀려오는데…정작 최치원의 고향인 경주에선 그의 동상 하나, 그의 기념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상서上書각'과 페허 같은 '독서당' 뿐이다. 우리 경주에서도'최치원의 관광 상품화'가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독서당'에 그의 동상도 하나 세우고, 고운선생의 훌륭한 개혁정신과 선비정신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홍보하면 어떨까? '최치원의 독서당' 혹은 그의 사상을 기리는 징표라도 만들면 어떨까? 나는 독서당 입구에 붙은 최치원 안내문을 살핀다. "독서당은 통일 신라말기의 학자, 문장가인 최치원(657-?)이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담장 밖에는 철종 원년(1850년)에 건립한 유허비가 있다. 6두품 출신으로 일찍이 당에 유학가 18세 때에 '빈공과'에 급제 했으며 '토황소격문'을 써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헌강왕 11년에 귀국한 후 진성여왕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건의하여 '아찬'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개혁안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이에 실망하고 은둔하였으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아, 신라 최고의 지식인, 문장가, 정치가 최치원! 12살에 당나라로 유학 간 신라 최초의 유학생, 18년 간 관직과 문필생활을 하며 '계원필경'이란 문필집을 낸 자랑스런 조상 최치원, 그러나 6두품의 신분으로 신라 골품제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정치무대에선 소외되어 변방으로 외로운 구름처럼 떠돈 그의 삶, 어린 고운선생께서 뛰놀았던 생가는 어디쯤일까? 그가 심었다는 담장 밖, 향나무는 어디 있는가?… 나는 나대로의 몽상에 잠기며 봄볕 흐르는 낭산 자락을 혼자 걸어내려 오는데, 밭 두렁가 비닐 하우스에 쌓아 둔 퇴비 더미에서 갑자기 봄의 냄새가 확! 코를 찌른다. 김 성 춘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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