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적잖아 안타깝다. 세상이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제대로 안 돌아갈 때 드러나는 병리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치․경제․사회적 갈등과 불안이 보통사람들을 지칠 대로 지치게 해서 그렇다면 더욱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죽기보다 살기가 어렵다’는 말은 들리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불행하게도 지난 2004년부터 세계 1위라는 불명예의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80세 이상 고령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가운데, 연령대가 내려오면서 낮아진다고 하며, 남성 자살률은 여성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이 사실은 과연 무얼 말해주고 있는가. 특히 중년남성의 자살은 실업과 생활고 등 경제 상황 때문이라면 대책이 시급하다. 또한 노인들의 자살 요인이 가족 해체나 노후대책 부재 등 고령화 사회의 그늘 때문이라는 점도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되는 조기 퇴직과 실업 행렬, 대책 없이 황혼을 맞이하는 노인 문제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노인의 70%가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들을 기다리고 건 빈곤, 질병, 소외와 ‘할일 없음’이고, 이들을 부양해야 할 중년층의 고충까지 떠올린다면 한숨이 안 나올 수 있겠는가.
옛날 클레오파트라 집권 시절 ‘자살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사회 공인이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을 때 소신이나 약속을 죽음으로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에서도 그런 자살이 영웅시됐다. 그러나 명예를 건 ‘명분 자살’이 허용되던 유럽에서도 13세기부터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살은 타살보다 죄가 무겁다.’는 해석을 체계화한 이후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자살을 죄악시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카락 한 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게 유교의 신체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신체관을 받드는 사회에서의 자살 문제에 대해서는 사족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그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만 있는지….
자살의 유형은 물론 여러 가지다. 개인의 억울함, 분함, 고달픔에서 오는 ‘개인중심형’과 조직과 ․집단의 의리나 명예로 인한 ‘집단중심형’이 대표적인 예다. 어느 쪽이든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생명의 존엄성이 허물어지고 목숨을 경시하는 가치관도 큰 문제다. 그러나 오죽하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겠느냐 하는 데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 살림과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계층 간의 위화감이나 박탈감이 해소되지 않고 양극화로 치닫는 한, 이런 사정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건 그야말로 ‘먼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반목과 갈등, ‘나’만 아는 이기주의의 깊은 골,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에선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보통사람들은 민심을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를 우려해 왔다. 악화일로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경제를 크게 걱정해온 것도 물론이다. 나빠지기만 하는 그런 수렁에서 벗어나게 해줄 지도자를 한없이 목말라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가 잦은 나라로도 악명이 높다지만,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보다도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니 그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반시장적 포퓰리즘과 ‘코드병’을 벗어던지지는 못하고 있으니 이 역시 ‘마이동풍’이기만 한 것일까.
어린 시절, 어떤 시인은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 입가에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러나 요즘은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 예찬이 무색할 지경이다. 올해 봄이 오는 길목에서는 꽃샘바람과 미세먼지가 유난스러웠고, 날씨가 변덕 그 자체였다. 봄이 너무 일찍 오는 듯하더니, 한여름 같은 봄이 이어져 어떤 친구는 ‘날씨마저 세상을 닮아 미친 여자 널뛰듯 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자살을 권할 정도로 난국이라면 지나친 말이기만 할까. 정녕 이제부터라도 달라질 수는 없을까. 다리걸기를 일삼는 정치 풍토가 바뀌고, 경제가 살아나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절망뿐일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아쉬운 대로 기댈 언덕이 생기고, 인정이 되살아나며, 살만한 ‘따스한 사회’로 거듭나려면 정치가 등 사회 지도층부터 달라져야 한다. 보통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오만과 독선, 눈앞의 이기주의를 벗어버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끌어안아 일으키고 나누려는 마음에 새롭게 불을 지펴야만 할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