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은 의술이 발달하고 성장의 적기에 영양실조의 아픈 경험이 없었던 관계로 평균수명이 날로 늘고 있어서 천수를 누리는 시대가 되어가는 듯하다. 고장 난 인체의 기관들을 자동차 부품 교체하듯이 바꾸어 조립해서 고통을 참고 견디며 걸어야 했던 관절통의 걸음걸이도 정상화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현실이다. 칠순을 맞이하여 자식들이 돈을 모아 여행을 보내주는 유행성 도리도 바뀐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식들이 '칠순 기념으로 노후한 심장을 새로운 인조심장으로 바꿔준다'는 농담 비슷한 고무적인 말이 들리고 있다. 지금 병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도 조금만 더 참고 있으면 인체를 깨끗하게 보링(boring)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유한한 수명을 갖는 인간 유기체의 생물적 생명이 무기불사체로 살아가는 세상이야 어찌 올까 만은 사회적 생명은 영원히 장수한다고 하니 불로장생의 길은 오직 이 길이 아니겠는가. 노자에 의하면 성인(聖人)은 하늘과 땅과 마찬가지로 무진장한 도의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구원(久遠)하도다. 하늘이 영원하고 땅이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지는 영원하고 오래 살 수 있느니라(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에 둠으로써 남보다 앞서게 되고 그 몸을 남을 위해 버림으로써 영원히 살게 되도다. 이는 성인이 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인은 결국 이렇게 해서 자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라(是以成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이 구절에서 하늘과 땅이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체의 생명활동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공익적 삶에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위해 사는 것 보다 생명의 영원성을 기대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을 남보다 뒤에 둔다는 것은 자기 과시적이지 않고 스스로 낮추려는 겸손의 미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대인관계에서 불손하거나 거만한 것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불손하고 거만하면 욕설을 듣기 쉽지만 겸손한 태도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칭송을 들을 수 있는 행동거지이다.  그래서 노자는 장수하는 비결을 자신을 위해 살려고 생명활동을 낭비하지 않는 다는 것과 남의 뒤에 있으려고 하는 겸손한 태도라고 갈파한 것이다. 이와 같이 덕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덕을 돈독하게 간직한 이는 갓난아이에 비할 만하다고 했다. 갓난아이는 독충이 쏘거나 물지를 않고, 맹수도 덤벼들거나 할퀴지 않으며, 사나운 새도 덮치거나 채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사나운 동물도 덕을 갖춘 성인 앞에는 마치 갓난아기를 해치지 않듯이 유순해 진다고 하니, 억지로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흉이라는 것이다. 만물은 억지와 무리를 쓰면 쇠하는 법이며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도에  어긋나게 되어 망한다고 하니 노자의 불로장생에 관한 가르침은 수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통기한이 끝난 말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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