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3일 오후, 노서동 금관총 현장에서 '2015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회'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금관총 발굴팀장인, 경주출신의 젊은 고고학자 '김대환'씨의 긴장된 목소리가 인상적인 아주 뜻 깊은 보고회였다. 나는 그날 '발굴조사 보도 자료집'에 실려 있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처음 보는 '두 장의 흑백사진'에 시선이 오랫동안 꽂혔다. 한 장의 사진은, 1912년 11월, 일본 데라우찌 총독이 경주를 찾는 사진이었는데, 이상한 모양으로 훼손되어 가고 있는 '금관총' 봉토 앞에서, '데라우찌'가 찌프차에서 내리고 있고, 봉황대 옆 '성덕대왕 신종' 종각이 보이고, '금관총' 옆 길, 긴 신작로에는 한복 입고 나온 (동원된 듯한) 경주 촌로들이, 줄지어 서서 일본 '데라우찌' 총독을 영접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1921년 사진으로, 금관총 봉토가 졸속으로 유물 발굴 된 후, 그냥 파헤쳐져 방치되고 있는 옛날 사진으로, 당시 '주막집' 집터를 넓히기위해 금관총의 작은 언덕을 파헤쳤던, 문제의 그 '주막집 초가'한 채가 보이는 사진이었다. 아아… , 수많은 세월 속에서 우리의 중요한 문화재들이 저렇게 무심하게 방치되고 무심하게 훼손되어 왔구나… (일제시대 금관총 옛 사진을 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다) 강점기 시절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저 돌무지덧널무덤들, 신라의 화려한 금관을 처음 발견했던 우리의 금관총이 아닌가, 자랑스런 우리의 금관총을!. 이번 '금관총 재 발굴'의 중요한 성과는, 지금까지 몰랐던 금관총의 크기와 매장 구조에 대해서 새롭게 확인했다는 점이다 첫째, 금관총의 크기는 대략 직경 40미터, 적석구 20미터, 높이 10미터의 대형 봉분이다  둘째, 금관총 내부의 목조 가구(사다리꼴 형태)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점이다. 셋째, 출토된 유물은 별로 없으나 새로운 코발트색 유리그릇(실크로드와 관계있는 로만 글라스)조각과 은제허리띠가 추가로 출토됐다는 점이다. 수많은 적석층의 머릿돌들은 과연 어디서 운반해 왔을까? 북천내 돌들일까? 서천내 돌들일까? 저토록 엄청난 돌과 흙들을 나르느라 신라의 민초들은 또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왕릉을 볼 때마다 나는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왕릉에는 보이지 않는 역사의 비밀들이 숨쉬고 있고, 들리지 않는 민초들의 슬픔이 들린다. 이번에도 밝힐 수 없었던, 무덤 속 큰 칼의 주인공, '이사지왕'의 정체는 과연 누구인가? '이사지왕'의 정체는 영원히 미궁에 빠지는가? 봉황대의 주인공과 '금관총' 주인공은 어떤 관계일까? 금관총의 주인공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여자라면 봉황대 왕의 '왕비'일까?… (나의 몽상은 끝이 없다) 내년엔 경주시와 문화재청이 '금관총'을 관광자원화 한다니 잘 한일이다. '금관총 관광 자원화!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경주에 또 하나의 관광 명물이 탄생 될 것이다.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교수·시인 김 성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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