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라 절터'중 하나가 '영흥사(永興寺)터'다. '흥륜사(興輪寺)' 다음가는 고찰로 신라 최초의 비구니(比丘尼) 사찰이다. '법흥왕 비(妃)'와 '진흥왕 비'가 이 절에 주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고, 서천 변 '삼천기(三川岐)' 부근에 있었다는 절 '영흥사!''문천'과 '모량천'과 '내남천'의 삼천(三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생긴 '삼천기', ('영흥사터'는 '서천'변 어디쯤에 있었으리라) 부근에 화려한 모습으로 있었던 비구니 절 영흥사. 그 유명한 '삼천기' 지점도 확인할 겸, 오늘도 나는 내 친구, 월유 선생과 함께,경주에 살면서도 먼저 '삼천기'가 있는 '서천 변'쪽을 처음으로 가본다.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뒤쪽을 지나, 가정집들이 밀집된 골목길을 지나, 큰 도로를 건너서 가정집 근처 밭에서는 깨어진 신라시대 기왓조각들이 지금도 보이고 있다. 정비된 고수부지를 따라 쭉 내려간다. 지금은 '서천'주변 하상(河床)이 말끔히 정비가 되어 있어, 천 년 전 옛날에 이곳에 과연 큰 절터가 있었을까? 지금은 도저히 상상이 잘 안 된다. 내 손엔 지금 사진 한 장이 들려 있다 . (1962년도 '서천교' 남쪽 하상에서 발견된 '영흥사지'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경주박물관대학 답사자료집 2) '영흥사지'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발굴된 석조물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남쪽 뜰에 옮겨져 있다. 사진에는 새로운 절터로 추정되는 주춧돌과 신라시대 석재들이 강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멀리 '서천교' 다리가 조그맣게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흥사'에 대해서 '부의 남쪽 (부남府南)에 있다'고만 언급하고, 이수(里數)는 표기 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보여 지며 '흥륜사'는 부의 남쪽 2리'라고 했으니, '영흥사'와 '흥륜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흥륜사'에는 '법흥왕'과 '진흥왕'이 주지로 있었음을 생각할 때, 두 왕비가 주지로 있었던 '영흥사'와 '흥륜사'는 서로 이웃하고 있었던 절로 추정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디가 과연 '영흥사지'인지는 그 곳을 정확히 알 수 가 없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영흥사' 기록을 다시 본다.영흥사는 흥륜사와 같은 연대에 착공했다.(삼국유사 , 아도기라조)진평왕 36년 2월에 영흥사의 소불(塑佛)이 저절로 헐어지더니 얼마 안 되어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돌아 가셨다.(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평왕 36년조)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중의 하나인 삼천기(三川岐)'에 세워졌다고 하는 영흥사, 왕비가 주지(住持)로 있었다니 그 절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분명 아름다웠으리라. 신라 여인의 향기가 흘렀을 것 같은 그 '영흥사'는 과연 어디쯤에 있었을까? 나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역사는 과거이면서 또한 오래된 미래다. '사라진 향기로운 신라의 비구니 절터 영흥사!' 영원한 역사의 미스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