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유교문화(儒敎文化)가 '배척'되기 시작한 것은 운동에서 공자(孔子)타도를 외치며 반제반봉건을 기치로 내걸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5·4운동을 시작으로 진행된 유교문화의 시련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설과 1966년부터 10여 년 간 진행된 문화대혁명에서 절정에 달했다. 맑스와 레닌주의에 의한 역사유물주의 세계관과 방법론으로 무장한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이후의 사상개조 작업을 통해 전통적이고 낡은 유교사상의 근원을 중국사회에서 제거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改革開放)과 경제성장은 정권을 강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정권의 질적 변화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공자와 전통문화(傳統文化)가 서서히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7년 8월에 유학국제학술토론회가 열리고, 21세기 들어서는 성인(聖人)의 위치로 복권되기 시작하여 2004년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에서 열린 공자 탄생 기념식을 가지면서 그 규모와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공자는 타도의 대상이고 국가와 민족의 원흉이었다.하지만 중국은 경제발전에 따라 공자를 부활(復活)시켰다. 목적은 공자가 정치적으로 청렴결백(淸廉潔白)의 이상(理想)으로 상징되며, 중국이 발전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중국의 꿈(中國夢)을 공자사상에서 찾으려 했다. 중국의 발전에 따른 공자의 위상 변화는 국내적으로 발전에 따른 부작용 해소를 위해 공자의 부활이 표피적인 것에 머물렀다면, 최근에는 정신과 사상을 이용하여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중국의 내부적 불만 요소를 해소하기 위해 공자사상에 대한 재조명의 이유는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 유교적 특성은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특징으로 하는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 국가와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시장경제의 발달과 함께 물질문명의 폐해가 커지자 마르크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만으로는 중국사회의 통치 이념으로 부족하다고 보고 중국의 전통사상에 눈을 돌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경제적 측면에서 선부론(先富論)으로 빈부격차의 양극화가 가속화되면서 공산당에 대한 믿음보다는 도전하는 의식으로 전환되면서 중국사회의 불안정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었다. 후진타오 주석은 '조화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새로운 통치이념을 내걸었다. 그것은 20여년의 시장경제화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격차를 줄여서 사회 안정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후진타오는 이 과정에서 유교적 가치의 부활에 힘을 실었던 이유는 충, 효, 인 등이 사회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셋째, 사회적 측면에서 고속경제발전과 함께 가족구성과 도덕관념에서 파괴적 형태가 발생했다. 농촌에서 대도시로의 집단이주는 농촌사회의 가족을 붕괴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고, 도시로 집중된 농·민·공들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주의의 근간을 흔들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교사상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경제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의 불안정과 가족 및 사회의 도덕붕괴를 치료할 수 있는 중요한 정신적인 기준으로 판단함에 따라 더욱더 유교(儒敎)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넷째, 문화적 측면에서 경제 및 군사패권과 함께 반드시 '문화 패권'을 추진하여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의 하드파워에서 문화를 앞세운 소프트파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경제발전에 따른 빈부격차, 가족질서의 해체 등과 같은 사회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시진핑(習近平)은 2013년부터 부패척결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13년 4월엔 형식주의, 관료주의, 향락주의의 사치풍조를 타파하는 '4풍 척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중국에서 유교문화에 대한 부활은 유교의 최종 목표인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중국지도부가 추구하는 이상사회 건설의 사회주의 목표와 유사하다고 보아 개혁과정에서 부활되었던 유교를 대내외적으로 중국공산당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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