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천'은 길다. '북천'은 먼 옛날 신라시대에는 어떤 냇 거랑 이었을까? 신라 시대 '북천'은 '알천(閼川)'으로도 불렸다. '북천'의 상류 쪽은 옛날 그대로 '동천'이고, '서천'과 가까운 하류 쪽은 '북천'이라고 불렀다. '북천'의 북측 언덕은 '고성숲(독산)'으로 동서로 누워 있는 언덕이다. '북천'은 바닥이 돌밭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북천' 냇 거랑은 어떤가? '북천' 건너편에는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서 아름다운 옛 '북천'의 정취는 사라지고, 삭막한 '북천'이 되어 실망과 아쉬움이 크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북천'에선 불행한 드라마가 있었다. 법흥왕 원년(진흥왕 39년?), 원화(源花)로 불리던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아릿다운 두 여인 사이에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원화 '준정'이 '남모'를 시기하여 독한 술을 먹이고, 죽여서 북천의 돌무더기 속에 파묻어 버린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 범죄란 없는 법'. '남모'와 가깝게 지내던 낭도들에게 타살의 비밀이 발각되면서 '준정'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준정'은 참형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화랑제도가 바뀌고, 풍모와 자질이 뛰어난 '동남(童男)'을 뽑아 '화랑(花郞)'이라 부르고, 그 밑에 낭도들을 배치하여 '화랑도'가 출발 한다. 오늘날 경주 시민들의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는 '북천' 긴 산책로를 걸으며 옛 비극의 드라마, 그 역사적 사건들을 떠올려 본다. 인재 양성제도에 신라는 왜? 처음부터 아름다운 여성을 추대 했을까? '남모'를 파묻어 버렸다는 그 비극의 '북천' 냇 거랑, 그 장소는 과연 오늘날 어디쯤일까? '준정'은 무슨 이유로 '남모'를 죽였을까? 단순한 여자의 시기심 때문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두 여자 사이에는 (아무도 모르는) 모종의 '어떤 남성'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소위 그들의 '사랑의 삼각관계'가 불러온 비련의 결말이 아닐까? 아무도 역사의 비밀은 알 수가 없다. '북천'은 또, 제38대 원성왕 즉위과정에도 일등공신이다. 즉, 원성왕인 '김경신'은 북천 냇물 덕에 임금이 된다. '37대 선덕왕(宣德王)'때 상재(上·수상)였던 '김주원'은 집이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왕이 돌아가자 사람들이 '김주원'을 모셔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갑자기 북천 냇물이 불어나, 그가 건널 수가 없자, 다음 자리에 있던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들이 모두 와서 따르고 축하하였다. 나는 북천 돌길을 혼자 서성거리며 별별 생각을 해본다. 알 수 없는 건 역사의 배후다. 준정과 남모의 슬픈 드라마가 있었던 북천! 불어난 '북천' 물 덕분에 왕이 된 김경신! 그것은 '김경신' 일파가 일으킨 왕권을 향한 대 역전의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경주는 고도(古都)의 정취는 사라지고 있다. 천년 역사의 미스터리는 끝이 없고 '북천'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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