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국인의 비즈니스정신의 원류를 주로 전통적인 儒家思想과 老子 思想에서 찾는다. 그 중에서 문화대혁명시기에도 단절되지 않았던 노자 사상은 생활정신을 넘어 비즈니스 정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노자의 ‘물의 철학(上善若水 - 水善利萬物而不爭)’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도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노자사상 행동 양태의 핵심으로 중국인들의 비즈니스와 경영 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물의 속성의 이해는 중국 상인들의 滯貨된 보편적 속성을 추출하고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본다. 강이나 바다처럼 항시 낮은 자세로 임하여 겸손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여 계곡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이해관계자 집단에 대해 베풀고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적대시하거나 지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정해진 행태가 없으면서 아무데나 스며들고 날카로움과 단단함이 없지만 돌 같은 강한 것들도 부수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처럼. 상인의 비조(鼻祖)이며 상성(商聖), 상신(商神)으로 추앙받는 범려(範蠡)는 노자의 제자로 그의 스승인 노자의 사상철학을 비즈니스에서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다. 그는 노자와는 동향으로 거의 120세(?) 까지 산 스승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후원했다고 한다. 범려는 우리에게 와신상담(臥薪嘗膽)과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로 더 익숙한데, 그는 또 중국의 절세가인 서시(西施)와의 염문(?)으로도 유명하다. 범려는 물의 철학과 아울러 특히 도가철학의 정수(精髓)인 ‘공성신퇴(功成身退)’의 정신을 매우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 ‘공성신퇴(功成身退)’는 범려가 그의 주군인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도와 오왕부차(吳王夫差)를 멸하고, 구천이 패업(霸業)을 이룬 후 홀연히 떠나 장사 길에 나선 일을 말한다.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인공으로 그는 구천의 ‘환난은 같이 할 수 있어도 복은 함께 누릴 수 없는’ 인물됨을 일찍 파악하고는 성공 후 약속된(?) 부와 명예,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그가 직접 훈련하여 부차(夫差)에게 파견했던 중국의 마타하리(Mata Hari) 서시를 데리고(?) 서둘러 떠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향인 산동성 정도(定陶)에 정착하여 주로 도자기 생산과 제련업(冶金) 등을 하면서 도주지부(陶朱之富)의 최고의 부를 축적하였다. 그의 고향에는 붉은 흙이 많았는데 그는 이것으로 도자기를 만들어 팔았다. 이로써 훗날 도주공(陶朱公)’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사실 범려는 ‘한 주군에게 끝까지 충성하지 않았으며 관직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또 서시와의 결흔(?)’ 이 세 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후세인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바로 이런 점들이 그가 속세의 범인(凡人)과는 다른 뛰어난 면으로써 그가 오늘날 ‘장사의 신’으로까지 존경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범려는 부의 사회 환원을 충실히 실천하였다. 그는 처음 구천을 떠나서 제(齊)나라에서 “이자피(夷子皮‧술을 담는 가죽 부대)‘라는 이름으로 은거하며 장사를 하였는데, 훗날 그의 신분이 드러나자 모든 재물을 지인과 향리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제나라를 떠났었다. 그리고 또 그의 고향에서 다시 축적한 재물도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등 일생을 노자의 물의 철학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범려는 또한 중국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공을 세운 후 스스로 관직을 사양하고 떠난’ 인물로 평가된다. 한(漢)나라 장량(張良)이 그를 배워서 한나라 건국 후 유방(劉邦)을 떠나 장가계(張家界)(?)로 숨어 들어가 서슬 퍼런 토사구팽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진(秦)나라의 여불위(呂不韋)와는 달리 먼저 정치에 입문하였다가 후에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훗날 여불위의 진시황에 의한 비참한 죽음과 달리 고향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공성신퇴(功成身退)’의 실천 결과이다. 월왕 구천이 패업(霸業)을 이루는 과정에서 고난을 함께 했던 재상 문종(文種)은 이러한 범려의 간곡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공 지분에 미련을 가지다가 결국에는 떠날 시기를 놓치고 구천에게 자진(自盡) 명령을 받았다. 토사구팽의 말로였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범려의 경제적 성공을 ‘택인임시(擇人壬時)’로 설명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유능한 인재를 곁에 두고 부리면서(擇人), 때의 흐름과 시변을 잘 알아 임기응변의 자세로 몸을 때에 맡기라는 것(壬時)이다. 사마천의 ‘택인임시’의 전제는 바로 범려의 ‘공성신퇴(功成身退)’의 구체적 행보와 아울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인지 중국 국회의원인지’를 묻느라고 시끄럽다. 안팎으로 노자의 물의 철학과 공성신퇴(功成身退)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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