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년 주년을 맞는다. 해마다 맞는 광복절이지만 올해는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경주'가 신라천년고도이다는 것은 온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경주가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를 유일하게 통일한 국가가 '신라'고, 수도가 경주다. 때문에 경주가 정치,경제,역사,문화 등의 중추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문화적인 측면에서 경주 세(勢)는 더욱 강하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살펴보면,경주에 '예술학교(藝術學校)'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해 경주시민들이나 문화예술계,교육계 등에서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어찌보면 '잊혀진',아닌 사장(死藏)된 예술 교육기관으로 기억돼 안타깝다. 1945년 8·15일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 났다. 그 시점에 경주에 '경주문화협회'가 탄생했다.회장 최윤,임원으로 이의성(음악),손일봉(미술),김준식(미술) 등이었다. 재단이사에 수봉학원 이사장이었던 이채우(문학),김동리의 친구이자 대구지검 경주지청 초대 지청장이던 '이경의'의 아들 이기현이 상무이사를,김상권 등 46명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해방 후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이들은 대중 계몽활동과 조선의 신문화의 건설과 배양을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음악 이의성 중심으로 경주극장에서 음악회를 개최(1946.3.23)했다. 해방 후 극도의 혼란한 상황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통일국가를 자주적으로 수립하려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를 모태로 경주지역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힘이 바탕이 되어 1946년5월 '신라문화재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경주예술학교(慶州藝術學校)'가 설립된다.위치는 현재 서라벌문화회관 자리다.음악과 미술과,국악과 등 3개과 3년재였으며,신입생은 남녀 50명이었다. 초대 이사장은 이의성, 교장은 손일봉이다. 이 학교는 서울미대가 생기기전에 설립돼 서울,대구 등에서 지원자가 몰렸다. 당시 전국에서 모인 신입생들은 학교 뱃지를 달고 다녔으며,유명 교수진들로 인해 자긍심이 대단했다.교수들은 배운성(독일국립미술대학),주경(일본제국미술학교),손일봉(동경미술학교),한상진(일본 와세다대학원) 등 쟁쟁한 인사로 채워졌다. 6·25 전 1950년 2월 경주예술학교는 대대적인 교수진 개편을 했다.명예학장 배운성을 비롯 중앙화단의 중진작가들이 교수로 참여했다. 하지만 6·25가 터지면서 학교는 내홍을 겪는다.일부 교수들이 월북하는 등 학교가 사상논쟁과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1952년3월 제5주년 기념전람회를 개최한 후 폐교되었다.일부 학생들은 홍익대학교 편입했다. 특히 이 기념전람회 방명록에는 기금을 기부한 사람의 명단이 있는데,이는 근대시기 전시의 비용을 내는 형태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경주예술학교는 분단 이후 한국예술계를 주도했다. 안타깝게도 개교 5년만에 폐교된 이 학교를 다시 부활해 최초의 뜻을 다시 이룰 필요가 있지 않을 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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