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년 8월 고대 한반도의 새로운 변화를 촉발하게 된 백강전투(白江戰鬪, 현재의 금강)는 백제와 왜(倭)의 연합군과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였다. 이 전투를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로 표기하고 있다. 왜와 백제 부흥군이 신라의 백제점령을 막기 위해 금강 일대에서 대규모 '연합군사'로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전투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2일간 짧게 치루어진 이 전투에서 패전한 왜는 자국의 영토는 빼앗기지 않았지만 정치체제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백제 부흥군의 활동에 결말을 고하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투였다. 이후 671년 백제의 옛 땅에 설치된 웅진도독부에서 당나라 장군 곽무종과 그 휘하에 있던 2천명의 사람들이 47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왜국으로 가자 왜국은 그들에게 갑옷, 활, 화살 등 군수품을 증여했다. 곽무종과 그의 무리가 왜국에 들어간 사실을 671년 왜국에 입국한 신라사절단이 귀국하면서 이 사실이 알려져 신라는 외교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만약 당(唐)과 왜(倭)가 동맹관계가 성립된다면 이미 당나라와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 신라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백제 부흥군에게 수군(水軍) 1만 명을 동원하여 총력적으로 지원했던 '천지천황계'가 백강전투에 실패하면서 왜국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새로운 '천무천황계'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는 신라에게 왜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 천무천황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왕족과 고위층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냈다. 당시 당나라의 서역전선이 안정되어가고 있어 신라에게는 더욱 불안한 징조였기 때문에 당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신라는 왜의 천황과 그 가족, 고위 귀족들의 환심을 사야했다. 이에 신라는 당시 천황을 비롯한 왜의 최상층에 대한 배려와 물량공세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당과의 관계가 나당전쟁 이전으로 회복한 신라는 왜와의 관계에서 종전과는 달리 고자세로 변하게 되었다. 734년 당 현종은 신라가 영유하고 있던 평양 이남의 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전까지 취해왔던 신라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청산했던 것이다. 이제 신라는 왜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당과의 관계가 냉전이 될 때에는 왜의 향배는 신라에게 치명적이지만 당과의 관계가 호전될 때 왜와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왜는 신라에 대한 배신감에 신라를 정벌할 계획을 논의할 정도로 신라의 변화된 태도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라는 742년 신라에 온 일본사신을 경덕왕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에 보내는 국서에서 종래 천황에게 썼던 조(調)를 낮추어 토모(土毛·땅에서 나는 식물)라 개칭하였다. 이에 왜국 역시 신라의 사신을 곧바로 돌려보냈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현실에 부흥하지 않은 외교는 외교가 아니다. 비현실적 외교는 적국들을 단합시키게 하고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강한 나라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나라가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배후를 안정시키면서 기다려야만 생존하여 자주성을 지킬 수 있음을 신라는 알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외교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를 비롯한 각국들은 국제정세의 풍향에 따라 자국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는 우리와 맺은 외교정책 정도는 언제든 쉽게 바꿀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우리스스로 자주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을 준비하는데 있어 한 치의 소홀함이 나 방심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돌아보면 인류의 역사전체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제71주년 광복절에는 자주국가를 위해 노력하였던 순국선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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