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초가을 들판을 걷는다. 반월성 옆구리 빈터엔 벌써 코스모스가 장관이다. 경주에서 걷기 좋은 한적한 길, '월정교'에서 '반월성' 옆의 남천 길을 따라 걷는다.  교촌, '월정교 공사장' 옆 안내판에는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라는 친절한 안내판도 보인다. 반월성을 끼고 돌아서 내가 좋아하는 국립경주 박물관을 찾는다.  나는 박물관을 찾을 때면 언제나 남쪽 구석에 외롭게 서있는 '고선사' 삼층 석탑 앞 벤치에 앉는다. 눈으로 고졸한 삼층탑을 어루만지며 혼자만의 몽상에 잠기기를 좋아 한다.  지금은 '덕동호' 물속으로 사라진 절. '고선사 탑' 앞에서 원효(617-686)를 생각하고, '물속의 절' '고선사'를 떠올린다. 암곡동 깊은 골짜기, 산 그림자 속에 '물속의 절'은 물고기들과 청둥오리들과 노닐고 있다.  스님들이 해질녘 늦은 발걸음으로 고선사 절로 돌아가는 모습들이 달밤에는 환하게 더 잘 보인다. 지금도 '고선사' 옛 절터는 아마도 절문을 닫지 않고 늦게 돌아오는 스님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우리들 영혼의 스승, 원효! 그는 누구인가?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원효가 도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을 느껴 물을 마신다. 그런데 그날 밤 원효가 마신 물은 달콤하고 시원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토굴이 아닌 공동묘지였고, 마셨던 물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라고 대오(大悟)한 원효는 유학의 길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다. 원효가 우리에게 던져준 '일체유심조'의 화두, 일심(一心)사상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더 절실한 현대의 화두가 된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닌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뚜렷한 자기주장, 자기만의 인생관은 소중하다. 흔들리지 않은 철학이, 한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우리는 원효의 행적에서 배운다.  모든 생의 욕망과 고통들도 결국은 내 마음속의 일. 원효는 왜 저잣거리에 서 미친 듯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 교화에 힘썼을까? 왜 가난한 사람, 어린 아이들에게 까지 부처님의 이름을 알도록 노력을 했을까?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을 중심에 두는 그의 소통 정신은 위대하다. 겸허한 자세로 소통하는 정신은 부처님의 갸륵한 자비 정신이다.  신라시대·당나라 '유학파'들의 기존 정치세력들 속에서 '국내파'로써 고군분투? 했던 원효.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황룡사 백고좌'의 명 강의, 그 당시 어떤 스님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원효 스님만이 할 수 있었던 '금강 삼매경'의 뛰어난 강론, 그 날, '황룡사' 경내에 울렸던 그의 사자후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요석공주와 원효'의 러브스토리는 또 얼마나 인간적이면서 환상적인가. 원효대사가 어느 날 거리를 누비며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나에게 주지 않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라며 노래를 불렀다. 태종 무열왕이 그 노래의 의미를 알고 말했다. "아마도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위대한 인물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대사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한다. 원효는 궁리를 보자 일부러 '월정교'에서 떨어져 옷을 적신다. 요석궁으로 안내된 스님께서 옷을 말리며 '요석공주'를 만나고 사랑이 싹튼다. 이 인연으로 원효와 사랑을 하고 '신라 십현', 설총을 낳는다. 나는 삼층 탑 곁, 흩어져 있는 고선사 금당터, 강당터, 주줏 돌과, 원효의 손자 '설중업'이 원효를 기리며 만든 '서당 화상비'받침돌, 목 잘린 거북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린다. 초가을 햇살이 석탑 꼭대기에서 졸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