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부터 내려온 상업과 상인을 천시하는 분위기는 한(漢)나라 때도 그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특히 한 무제(武帝)때에 이르러 정경유착으로 과거제도가 무색해지고 빈부격차는 날로 심각해졌다. 기득권자와 개국공신이 중심이 되는 관료사회의 색채 역시 더욱 짙어져갔다. 무엇보다도 당시 독존유술(獨尊儒述)과 염철(鹽鐵)의 전매로 부상대고(富商大賈)의 성장을 억제하는 정책들은 상업과 상인의 성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주자학자들이 안빈낙도를 실천한 안연을 극도로 높이고 의도적으로 자공의 유상행보를 깎아내리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관(史官)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대작인 역사기록서 '사기(史記)'에 대담(?)하게도 상업과 상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그것이 바로 '화식열전(貨植列傳)'이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을 통하여 한나라 초기의 경제발전상을 기록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경제 활동에 따른 부의 축적을 장려하였으며, 특히 신흥지주계급의 발현을 부추기까지 하였다. 이는 고대 사서에서는 거의 전무후무한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역사가 사마천의 탁월한 안목과 그의 시대를 초월한 경제사상과 경제철학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화식(貨植)' 이라함은 재화의 생산과 유통을 통해 이윤창출 행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화식열전'은 일종의 경제 경영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화식열전으로 상가(商家)의 사상적 비조인 관중이 관자<官子>를 펴낸 지 500여년, 자공(子貢)이 부상대고로 명성을 떨친 지 400여년 만에 상가(商家)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세상에 확인시켜주었다. (상가는 일반적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일원으로 거론되지 않았으나 하나의 사상적 흐름으로는 분명히 존재하였다. )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2천년을 관통하는 부자의 철학과 부자의 법칙, 상업의 시대적 가치를 말하였다. 그는 이미 당시에 시장과 가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부민부국의 요체는 중상(重商)에 있다고 역설하는 등 2000년 후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열전은 백이숙제 형제의 정신적 귀족의 삶의 이야기를 시대정신으로 하여 화식열전의 부의 추구에 대한 인간의 욕망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사마천은 상인을 위대한 정치가 제후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들의 비즈니스 스토리를 기술하였다. 그는 그들의 치부활동을 정당화 하였으며 비록 인의와 덕을 논하더라고 가난하고 비천하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는 '가난은 비웃어도 몸 파는 창기(娼妓)는 비웃지 않는다'는 상해상인들을 생각나게 한다. 사마천은 또한 오직 탐관오리의 치부만을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화식열전에는 계연, 범려, 백규, 그리고 자공과 같은 은수저 출신으로 당당하게 치부를 한 상인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천하게 심지어는 전쟁의 혼란을 이용하거나 불법 고리대금, 도굴, 도박 등 불법으로 치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당당하게 열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엎드려도 물건을 줍고 고개를 쳐들어도 물건을 취하라'라는 가훈을 남길 정도의 자린고비 병씨는 대장장이로 돈을 벌었으며 고리대부업으로 치부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공부보다 장사에 관심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과부 나씨는 진시황의 비호를 받으며 목축업으로 치부하였는데 특히 이민족 흉노(凶奴)와 전쟁혼란을 틈타 치부 하였다. 이외에도 칼을 갈아 치부한 질씨가 있고 말을 고치는 의술로 돈을 번 장리가 있다. 술장사로 돈을 번 장씨가 있고 순대와 곱창을 팔아 돈을 번 탁씨도 있으며, 심지어는 도굴로 돈을 번 전숙과 도박으로 돈을 번 환발과 같은 매우 비윤리적인 상인들도 당당히 열전의 올려 이야기하였다. 사마천은 부의 추구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고 성정으로 배우지 않아도 능히 바라는 것이라 하였다. 한 대 유교 사상과 철학을 기본으로 한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에서 사마천의 부자철학을 혹독히 비판하여 '사기의 화식열전은 화식을 논함에 있어 세리를 숭상하고 빈천을 수치로 여겼으니 이것이 폐단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는 사마천 자신이 '벌금을 내지 못해 궁형(宮刑)을 당한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까지 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부자의 철학과 부자의 법칙은 무엇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