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라는 예기치 못한 재해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러나 경주의 하늘은 더 없이 맑고 전통시장은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하다. 성동시장, 중앙시장은 물론이고 불국장, 안강장, 입실장, 어일장, 건천장 등 오일장터에도 왁자지껄함이 오히려 구수한 요즘이다. 세상 살기 어렵다, 인심이 고약해졌다, 그렇게들 불평하지만, 우리는 다들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가느라 분주하다. 그 평범하고도 설레는 일상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이기원! 누구나 가진 지극히 평범한 권리들을 박탈당한 채 그야말로 쥐똥보다 하찮고 작은 자유만으로 우주의 광활한 시간을 살다 간 사람. 이기원(1937~1989)은 바로 그런 시인이었다. 그는 경주와 인접한 봉계에서 태어났다. 경주공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뒤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젊디젊은 나이에 '근육무력증'을 앓으면서 몸져누웠다.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므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희귀병이었다. 가장이 쓰러지자 아내는 생계를 위해 남편 대신 농사를 짓거나 화장품 외판원으로 가정을 꾸렸다.  이제 창 너머 한 뼘 하늘이 전부인 방 안에 갇혀버린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 거대한 절망이 빙벽처럼 가로막자 오랜 시간 그의 속에서 도사리고 있던 시의 말들이 터져 나왔다. 병상은 외로운 감옥 같았으나 그는 외로움이란 고통을 응고시켜 진주처럼 빛나는 시들을 낳았다.   "(생략)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 아침에 아내를 따라 걸어 나가고 // 갈 수 없는 것 / 담쟁이 넝쿨 같은 것 / 호박넝쿨 같은 것 / 철늦은 옷가지처럼 물러선 가을의 방 가운데 / 걸리는데 // 나는 당신을 가두어 놓지 않았으니 / 마음대로 걸어 다니세요 하는 / 여자의 소리" (이기원의 시 "누워서" 중)  이미 고등학생 때 경북예술제, 개천예술제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만큼 시인의 유전자를 지닌 그였다. 누워서 시를 쓰고 구술로 옮기면서 작품 활동을 한 끝에 급기야 1965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상이 잉태되면 그는 우선 머릿속에서 온전한 작품이 될 때까지 품었다. 마치 오랜 시간의 태아기를 거치듯, 그의 시는 그의 머리에서 성장한 뒤 비로소 태어났다. 그의 시를 옮겨준 사람들은 가족이었다. 그렇게 53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가기까지 그는 많은 시들을 남겨놓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출간된 유고시집 '겨울철쭉'에는 '시인 이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누워서 쓴 시! 평생을 병마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입안에 넣어 주는 밥을 먹으며, 옴짝달싹 못하는 육신을 끌고 그는 차라리 노래하는 나방이었다. 보라. 시작(詩作)을 향한 집념 하나로 불꽃처럼 뜨겁게 살다간 그. 좁은 방안은 그의 우주였고 시는 곧 삶의 확인이자 구원 그 자체였다." 창밖에 동이 터오거나 또 산 너머로 해가 저물 때면 나는 그의 노래를 되뇌었다. 누군가에게 시는 구원의 노래이지만, 또 누군가에게 시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커피 한 잔에 불과했다. 물론 커피 한 잔으로 구원의 노래를 삼는 이들도 없지 않으나, 내게 그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기호품일 뿐이었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시간이면 그나마 정직하게 옷깃을 여미며 나에게 시 한 줄의 의미를 물어본다. 구원의 노래인가, 커피 한 잔인가. 나는 노트를 덮는다. 더 이상 시의 왕조에 내 이름을 얹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간절함이다. 일상의 풍요에 젖어든, 부족함 없는, 이 가난한 영혼으로는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  높아진 경주의 하늘만큼 내 마음도 넉넉해지고 싶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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