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毛澤東)은 '하늘의 반은 여성(半邊天)'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체제 신(新)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함께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빈궁한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파촉(巴蜀: 지금의 四川)으로 시집와서 결혼한 지 4년 만에 과부가 된 여성 기업가 청(淸)은 전국(戰國)시대 말기에서 진시황 시대에 단사(丹砂 혹은 朱砂라고도 함) 광산 개발 및 단약(丹藥) 제조 등으로 부를 축적한 중국 최초의 여성 기업인이다. 사료에 의하면 그녀는 파촉 6개 군(郡)을 통틀어 최고의 부자였으며, 기업 규모는 당시 세계 최고였다고 한다. 집안의 가노(家奴) 수가 수 천 명이고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 및 그의 가족들 모두 합해 수 만 명에 이르는 등 당시 파촉의 인구가 4, 5만 명에 불과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기업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과부 청의 탁월한 치부(治富)능력, 특히 그녀의 재물로서 자신을 보호하고 주변의 이웃들을 돌보고 사회에 봉사하면서 국가에 공헌하는 재화운용방식((用財自衛人不敢侵)과 인간적인 기업경영관리(人性經營)방식을 높이 평가하면서 차별 없이 당당히(?) 열전의 반열에 올렸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천의 호기심과 비범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진나라와 진시황의 상업을 천시하는 천상(賤商)사상과 억상(抑商)정책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심하였다. 진나라는 상앙의 법가사상 채택과 함께 농전(農戰)으로 천하를 통일한 만큼 농업을 중시(重農)하였다. 다른 한편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그 가족들과 함께 강제로 변방으로 보내어져 군에 편입되었다. 뿐 만 아니라 상인들의 호적은 '시적(市籍)'이라 하여 일반 농민들과 별도 관리하면서 주변 유목민족들과의 전쟁에 우선 투입시키는 등 강도 높게 압박하고 핍박하였다. 그러한 진시황도 과부 청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관대하였다. 그녀를 수도 함양(咸陽)에 초대하고 살게 하면서 아팠을 때는 편작(扁鵲)을 능가한다는 의사를 불러 치료를 해주었으며, 죽은 후에는 심지어 그녀를 기리는 비석(懷淸臺)까지 세워주었다. 과부 청은 상인으로서 더군다나 여성 상인으로서 폭군으로 간주되는 안하무인의 천자(天子) 진시황으로부터 어떻게 이렇게 극진한 예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주사는 당시 매우 중요한 광물로서 붉은 색 물감과 진정제를 만드는데 소용되었으며 또한 옴과 버짐 같은 피부병치료제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주사는 독을 가지고도 있지만 부패방지의 효능도 있어 고대 방사(方士)들은 이를 사용하여 단약을 만들어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소망을 만족시켜주었다. 또한 제사 때 조왕신(俎王神)이 그것을 황금으로 만들어 주며, 이렇게 만든 황금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으면 불로장생하여 봉래산(蓬來山) 신선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주사는 일반 백성들의 삶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주로 고관대작과 귀족들에게 많이 소용되는 물품이었다. 과부 청은 진 황실에 바로 주사를 공급해주는 매우 중요한 공급처였던 것이다. 뿐 만 아니라 그는 진시황의 능침 조성에 소용되었던 막대한 양의 수은을 공급해주기도 하였다. 나아가 그는 진시황의 북방 흉노족을 방비하기 위한 만리장성 축조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 천상사상의 극점을 이룬 진시황이 과부청의 장사를 용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시황은 필요하다면 충분히 과부 청의 주사 광산을 가져와서 소유화할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진나라는 막 중국을 통일한 상태로 과부 청이 살았던 파촉 지역은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지역의 안정에 과부 청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의 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알고 활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진시황은 22세에 과부가 되어 정절을 지키면서 시가의 가업을 더욱 더 크게 키우고 특히 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주던 그녀를 매우 존중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과부 청을 '정부(貞婦)'에 책봉하였다. 사실 진시황은 그의 생모 조태후의 여불위(呂不衛), 그리고 또 가짜 환관 노애와의 얽힌 궁중스캔들로 적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이로 인해 남편 사후 정절을 지킨 과부 청을 더욱 더 존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부 청의 무덤을 현지인은 신선동(神仙洞)이라 부르며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며 복을 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