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다친다!" 흔히 쓰는 농담이자 진담이다.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는 '이겼거나 얻었는데도 손해인 것'을 말한다. 승자의 딜레마(winner's dilemma)라고도 하나 딜레마이기보다는 저주이다. 1950년대 미국 석유기업들이 맥시코만 시추건 입찰에서 매장량 가치를 잘못 판단하여 그보다 높은 가격으로 낙찰 받음으로써 비록 경쟁입찰에서 이겼지만 결과적으로 심한 손해를 본 데서 유래된, 경제학이나 협상론에서 쓰이는 말이다. 이는 협상이나 경쟁 등에서 정보의 부족이나 과욕 또는 과열경쟁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스의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고 하는 것도, 영화의 제목처럼 '상처뿐인 영광'도 이것이다. 오늘날 기업의 인수 합병에서 종종 발생하며, 올림픽 같은 대형 국제행사 후에 치명적인 빚더미를 짊어지는 현상도 이것이다. 경매장은 이 '승자의 저주'가 빈발하는 장터이며, 각종 선거에서도 자주 목도되고 있다. 완성 점수 100점이란 있는가? 자연과학 세계에는 있을 수 있겠으나 인문사회 분야에는 없다. 공무원 5급 공채(구 고등고시) 본시험에 평균60점 정도면 합격이요 65점을 넘으면 고득점, 70점대이면 신의 점수이다. 자연계도 만상의 천체가 밖으로 무한 팽창되고 안으로 소립자·중성미자들로 무한 수렴된다 하니 실로 영원한 미완성의 과정(ongoing process)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자연 분야든 인문사회 분야든 우주 질서에 있어 '불완전'은 본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인 잣대에 의한 사상(事象)의 평가에 '오차(e)'라는 것이 항존한다. 그러므로 자연이나 사회 현상에 '오차'의 존재도 본질적인 것이다. '승자의 저주'는 협상이나 경매, 국제행사 유치, 선거 등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 이 본질에 대한 수용선을 넘으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2016년 9월 28일에 시행된 '청탁금지법'(김영란법)으로 우리 사회는 청렴·공정 사회를 향한 아픈 걸음을 내딛었다. 하나의 문화 충격적 변혁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아픔 없이 태어나는 생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대학생이 교수의 목마름을 생각해 캔커피를 갖다 준 것을 다른 학생이 신고했다. 제자가 스승에게 출석처리나 성적을 부탁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탁 등도 없이 그냥 음료를 갖다 주는 것도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깡그리 몰아가는 것이 세상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까? 동법 시행으로 내수 위축과 문화적·정서적 손실을 경고한 분석도 있고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여정은 이미 시작됐다. 요는 제도의 핵심을 얼마나 맵시 있게 착근시켜 나가느냐 하는 점이다. 문화개혁의 집단사고 패러다임으로 결벽증적 완벽주의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정갈한 토양에는 싹이 트지 아니하고,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아니한다. 조금은 탁하게 살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법의 약칭은 왜 '부정 청탁'이 아니고 '청탁' 금지법인가? 국민권익위원회나 정부 부처들의 교육자료·사례집 등에 '청탁금지법'으로 되어 있다. 모든 청탁이 안 된다는 건가! 처음부터 완전하게만 시행하려다 우리 전통적 가치인 '정(情:emotion) 문화' 뿐만 아니라 능동성·유연성·창의성까지 손상될까 심히 걱정되는 것이다. 제도시행의 성취에 '승자의 저주'가 스밀까 두렵다. 넘을 필요가 없는 경계는 넘지 말자는 것이며, 세상의 본질적 부분까지 정리하려는 아니 될 과욕을 부리지 말자는 말이다. '승자의 저주'를 극복하는 방법은 정보 역량을 키우는 것이지만 '승리의 과욕'을 버리는 것이 우선이다. 현실에서 제로 섬(zero sum)으로 완승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병법 상 육참골단(肉斬骨斷) 즉 나의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뼈를 취하면 이긴 것이다. 조금씩은 지면서 살아야 하고, 어느 정도 남겨두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청자연적의 한 잎 꼬부라진 여유도 필요하다. 언제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고 그래서 계영배(戒盈杯)도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취하려 하지 말자. '불완전'과 '오차'의 본질을 인정하자. 70점이면 신의 점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