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감포 바다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태풍 '차바'가 할퀴고 간 생채기도, 우리의 마음까지 흔들어버린 지진 이야기도 훌훌 털어 볕 좋은 가을 햇살에 널어 말리고 있다.  굳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로 애써 위로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하얀 포말만 남기고 밀려가는 파도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등대처럼. 그렇게 가을 바다는 거기서 제 시간을 살아낸다. 선착장에선 만선(滿船)의 깃발을 세우고 돌아온 뱃사람들의 웃음으로 생기가 돋는다.  그리고 나는 감포의 푸른 가을바다보다 더 맑고 깊었을 한 사내의 눈망울을 떠올린다. 시인 최부철(1935~1966)이다. 감포읍에서 태어나 읍내에서는 현대시를 쓰는 첫 시인이 된 사람이다. 감포초등학교와 감포중학교를 다닌 뒤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1963년 청마 유치환 선생의 추천으로 '한밤중에 빗소리'가 '현대문학'지에 첫 추천을 받았고, 1965년 다시 추천을 받았다.  시인들 중에서도 특히 추천 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청마 선생의 추천을 두 차례나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촉망받는 젊은 시인이었는지를 잘 증명한다. 그러나 이듬해 최부철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추천은 완료되지 않았다.  최부철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내 백일장에서 '낙엽'이라는 시로 장원을 하는 등 일찍 두각을 드러냈다. 게다가 그림과 웅변은 물론이고 노래를 작사하고 작곡하는 능력도 남달랐다. 특히 피아노와 만돌린 등의 악기 연주에도 능했는데, 여름밤에 마루에 앉아 만돌린을 연주할 때면 마을 소녀들이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그의 연주를 들으며 가슴 설레어했다.  요양 차 감포의 집에 머물 때 최부철은 '감포문학회'를 결성했다. 이 모임에는 시, 소설, 수필, 아동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가진 지역의 문학청년들이 모여들어 회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함께한 사람 중에는 아동문학가 허동인 씨도 있었다. 이들은 감포 앞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밤을 새우며 문학에 대해 토론하고 향토문학의 터를 다졌다. 아직 새벽처럼 세상은 어둑어둑 했으나 이 땅 여기저기서는 그런 희망들이 아침을 맞고자 불씨처럼 모여들던 때였다. 최부철은 그렇게 자신의 젊음을 불태웠다. 어쩌면 활짝 피지 못한 채 져버리고 말 것을 알았던지 그는 마치 독립군처럼 그가 이바지할 '시의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나사렛의 청년처럼 그는 어쩌면 스스로 '다 이루었다!'고 되뇌이며 눈을 감았을지도 모르겠다.  투병 중일 때는 유치환 선생도 두 차례나 감포를 찾아 병문안했으나 끝내 서른둘, 그 푸른 나이에 서둘러 삶을 정리하고는 떠나버렸다. 그의 뒤로 300여 편의 시가 남았는데 작품의 수준이 하도 탁월하여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받았다.  그의 시집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에 실린 시 '어판장'이다.  번득이는 비늘은 신비에 잠들고 있던 바다의  내적 파장이라 생각한다.  속을 드러내어 볼수록 묘연한 너의 은혜여.  오늘은 만선이다 기를 꽂아라 땡땡이를 쳐라  돈푼이나 있는 중매인 몇 둘러서서 저 바다가 다 내 것이라는 듯 손을 번쩍 든다.  나는 10년 쯤 전에 함께 근무하던 그의 조카로부터 최부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발굴한 시 몇 편을 <경주문학>에 실으면서 이 시도 포함했다. 바다가 내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도 바다의 속살을 만지고, 거기서 충만한 은혜의 감사를 건져 올릴 줄 알았던 그는 어쩌면 병고를 겪는 동안, 아니 오히려 그 병고의 도움으로 삶의 큰 맥을 그 이른 나이에 붙잡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포초등학교 교문 앞 그의 집 마당에는 오늘도 가을햇살이 가득하다. 그리고 피를 토하듯 붉은 맨드라미가 시비처럼 서 있다. 우리가 기억하든 그렇지 않든 아무 상관없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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