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은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관중(管仲)을 상가(商家)의 '비조(鼻祖)'로서 '경영경제이론사상가'로써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였으며 또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관중'은 중농억상(重農抑商)이 주류인 춘추시대에 농상병중(農商幷重)사상으로 상공업을 진흥시켜 태공망(泰公望: 姜泰公)이 세운 제(齊)나라의 패업을 이루고 제 환공(桓公)을 춘추오패(春秋五覇) 제1맹주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관중'은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유명하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관중은 장사, 군인도 해보고 또 관직에도 몸을 담았었다. 그의 일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으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입신양명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상업에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서 정계에 진출한다는 것은 당시 시대 분위기로 쉽지 않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훗날 그는 제나라 공자(公子) 규(糾)와의 인연으로 그를 보좌하면서 정계진출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때 그의 친구 포숙아(鮑叔牙)는 또 다른 공자 소백(小白)을 모시고 있었다.  사실상 당시 제나라 군주의 명령이 있었으나 포숙아가 보기에 소백은 주군으로 모실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거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친구 관중의 충고를 받아들여 소백을 보좌하여 훗날 제 환공(桓公)으로 재위를 물려받게 하였다. 또한 제 환공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관중을 추천하여 제나라를 춘추오패의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하였다. 관중은 한 군주(糾)를 섬기지 않고 자기가 모신 군주와 왕위경쟁관계에 있던 소백이 재위를 잇자 그를 새로운 주군으로 섬긴 것에 대하여 특히 유가의 공자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관중은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예를 다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重大義, 不羞小義, 隱忍成就功名)'. 그의 대의의 중심에는 개인보다는 늘 제나라가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당시 세인(世人)들의 여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관중은 당시 상업을 천시하는 분위기에서 과감히 상공업 장려정책을 펼쳐 부국의 꿈에 도전하였다. 관중의 부국정책 역시 기본적으로는 중농에 있었다. 제나라는 산동반도에 위치하여 해산물과 소금, 제철업(冶鐵業)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훗날에는 양잠업으로 중국 내 실크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중의 상공업 진흥책의 핵심은 시장기능을 활성화하고 특히 사상(私商: 개인상인)을 장려하는데 있었다. 사실상 당시는 정치, 군사, 특히 상공업과 관련된 모든 이익과 권리는 제나라 군주만이 장악할 수 있다는 관상(官商)이 주가 되었으며 모든 것을 국가가 전매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점에 관중은 진공자(陳公子)를 공정(工正)에 봉하고 수공업의 왕으로써 수공업에 관한 모든 권한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뿐 만 아니라 당시 제나라 대부귀족인 전씨(田氏) 일가 역시 사상(私商)으로써 급부상하였다. 전씨 일족은 상공업의 힘으로 급기야는 태공망이 세운 강씨(姜氏)의 제나라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田氏取齊).  전씨 일가는 주로 곡식대출과 시장가격의 조정으로 부를 축적하고 백성들을 끌어들였다. 곡식을 빌려 줄 때는 전씨 집안의 큰 '되' 로 빌려주고(私量) 받을 때는 제나라 되(公量)로 적게 받았다. 또 목재와 해물의 가격이 산지에서나 시장에서나 동일하도록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등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관중의 사상(私商) 장려정책으로 성장한 전씨 일가는 정권 획득 후 오히려 사상을 통제하고 모든 물품의 국가전매를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관중은 당시 제자백가 중 가장 먼저 '민본사상'을 제기하였다. 그는 순탄치 않았던 인생역정 탓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경제정책 밑바탕에는 늘 백성이 중심이 되었고 국익이 우선되었다, 백성은 '곳간이 넉넉해야 예를 알고 의식이 족해야 염치를 안다"고 하였다. 물론 관중의 중상정책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을 함께 거주하지 못하게 하였다. 농민은 농민끼리, 상인은 상인끼리 살게 하였는데, 이는 당시 도시경제의 활발한 교류를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마천은 삶에 있어서나 그의 경제가치관 형성에서나 관중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사실상 관중은 사마천의 전대(前代)의 지기(知己)이며 사마천의 마음 속 우상(偶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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