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거칠부 등의 장군을 중용하여 한강유역을 획득하고,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화랑제도를 창시하는 등의 업적을 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국사를 편찬하고 중국과 통교하는 등 문화적 업적도 쌓았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즉위초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했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 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과 금현성(金峴城 지금의 전의)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해 빼앗게 했다. 이렇게 확보된 한강하류유역의 전초기지를 기반으로 그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해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했으며, 진흥왕은 거칠부(居柒夫)를 비롯해 구진(仇珍)·비태(比台)·탐지(耽知)·비서(非西)·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비차부(比次夫)·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했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해 이 지역을 점령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62년 백제의 신라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진흥왕은 이 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우선,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다. 국사 편찬에 관계한 이사부와 거칠부가 모두 내물왕계(奈勿王系) 후예라는 점과 당시 왕족의 혈연의식이 상당히 고조되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중고왕실(中古王室) 왕통(王統)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해 왕자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흥왕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奉佛)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553년에는 월성(月城)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佛寺)로 삼고 황룡사(皇龍寺)라 이름했는데, 이는 56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해 모셨다. 진흥왕대의 업적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화랑도'의 창설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오던 여성 중심의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창설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562년 대가야 정벌시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斯多含)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중흥의 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그리고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 정리=장성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