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대의 전제왕권이 약화되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치를 추구했다. 개혁을 위해 강력한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지방 조직과 관직을 한식으로 고치고 국학을 중시했다. 경덕왕의 이러한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이밖에 불교의 중흥에도 노력해 불국사, 석굴암 등을 창건했다.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憲英).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효성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했다. 경덕왕 때에는 신라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새로운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해 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가 취해진 시기였다. 개혁정치의 주역은 경덕왕과 신라 중대에서 행정책임자였던 집사부의 중시였다. 744년에 이찬 유정(惟正)이 중시에 임명된 이래, 대정(大正)·조량(朝良)·김기(金耆)·염상(廉相)·김옹(金邕)·김양상(金良相) 등 7인의 인물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역임했다. 특히,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侍中)'으로 변경했으며, 또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를 두어 유학교육을 진흥시키고, 748년에는 정찰(貞察)1명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게 함으로써,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제왕권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경덕왕의 개혁적 제도정비는 귀족세력을 제어하면서 전제왕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漢化政策)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화정책 추진은 745년에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던 김사인(金思仁)에 의해서 비판을 받게 되었다. 756년에 상소를 통하여, 근년의 빈번한 천재지이를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당시의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김사인의 비판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757년 병을 표면상 이유로 하여 상대등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 인물인 이찬 신충(信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55년에 시중으로 임명되어 김사인의 비판을 받았던 김기가 오히려 757년부터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 중심의 한화적 개혁정치는 중대의 전제왕권체제를 재강화하여 연장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이었으나 성공한 것 같지 않으며, 다음의 혜공왕 때에 가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됨으로써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경덕왕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재위하는 동안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賀正)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전제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萬宗)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시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재강화에 실패한 전제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지사(牟祗寺)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에 있다. 
정리=장성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