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38기 가운데 단 4곳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석인상'의 용도는 '후대의 왕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학설이 나왔다. 1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왕릉석물조각사 1'에 수록된 임영애 경주대학교 교수의 논문 '신라왕릉의 석인상'에 따르면 신라왕릉에서 석인상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신라가 석인상을 처음 세우기 시작한 8세기 후반부터 멸망하는 935년까지 대략 150여 년간 20여 명의 왕이 있었지만, 정작 석인상은 단 4기의 능에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38기의 신라왕릉 가운데 석인상이 발견된 왕릉은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이다. 이들 왕릉의 공통점은 왕경과 상대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 석인상이 특정 능원 형식을 지닌 능에만 세웠음을 알려 주는 이유다. 성덕왕릉 석인상은 8세기 후반 혜공왕 대에 추가로 세워졌으며, 원성왕릉은 경문왕 즉위 초 무렵에, 흥덕왕릉은 능비를 세운 때인 872~884년 무렵 석인상을 조성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롭게도 이들 4기 왕릉의 봉분은 모두 왕의 사망 직후 조성했지만, 석인상은 후대의 왕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 세웠다는 것이다. 혜공왕은 성덕왕을, 경문왕은 원성왕을 현창하는 일을 추진해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 특히 기반이 약했지만 의지는 강했던 혜공왕과 경문왕은 이 일에 더욱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대의 왕이 자신의 특별한 목적에 의해 앞선 왕을 현창할 목적이 뚜렷하다고 해도 무분별하게 조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석인상에 대한 규정은 매우 엄격했다고 판단된다. 신라왕릉의 석인상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머리에 관을 쓰고 관복 위에 갑옷을 걸치고 양손으로 긴 칼을 쥔 소위 '관검석인상'이며, 다른 하나는 한 손에 울퉁불퉁한 몽둥이를 거머쥐고 덥수룩한 수염에 커다란 눈과 코를 지닌 우락부락한 얼굴의 '무인상'이다. 그 가운데서도 '무인상'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라왕릉만의 특징이다. 관검석인상은 중국 석인상 형식의 영향이지만, 특이한 형상의 무인상을 세운 이유는 불교조각과 특별한 관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 임영애 교수는 "원성왕릉 입구의 무인상은 서역인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며, 사찰 입구에서 수호 역할을 담당한 불교의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했다고 본다. 얼굴 모습 또한 같은 시기 불교 금강역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서악의 능묘에서 발견된 문비의 금강역사상과는 아주 흡사한 모습이다. 신라왕릉 조각에 투영된 불교미술의 영향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장성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