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산가족 상봉후 소식이 끊긴 아버지의 생사를 알기 위해 뉴욕에 애끓는 편지를 보낸 북한 아들이 마침내 뉴욕의 고모부를 찾았다.
함경북도 부령군에 사는 노(로) 모 씨가 아버지 노명기 씨를 찾기위해 뉴욕 퀸즈에 거주하는 고모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뉴시스에 의해 처음 보도된지 하룻만에 주인공이 나타난 것.(뉴시스 2009년 3월 10일 08시9분 송고).
뉴욕의 고모부는 뉴욕한인사회에 잘 알려진 대동연회장의 김중현 회장(75)이었다. 당초 북한아들의 편지 사연은 열흘전 미동부 유일한 한국라디오방송인 ‘KRB(Korean Radio Broadcasting)'의 '장미선의 여성싸롱’ 시간을 통해 알려졌다.
김중현 회장은 당시 방송을 듣지 못했으나 뉴시스 보도로 또다시 이 편지가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퀸즈 한인교회 양 모 목사가 “혹시 북한의 아들이 찾는 뉴욕의 고모부가 바로 김중현 회장 아니냐?”고 물어 편지가 온 사실을 알게 됐다.
평양 출신으로 실향민인 김중현 회장은 “이번에 편지를 보낸 이는 우리 먼 친척이기도 하고 둘도 없는 친구의 조카라 내 조카나 마찬가지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찾으러 이북에 갔을 때 만났는데 어떻게 뉴욕까지 편지를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놀라워했다.
알려진대로 북한 아들의 편지는 주소가 정확치 않아 버려질 운명에 처했지만 미국인 우체부가 우표를 통해 북한편지임을 알고 한인 델리가게를 운영하는 김미선 씨에게 “주인을 찾아달라”며 건넸다. 이것을 김 씨가 KRB의 김준한 PD에게 방송을 부탁한 것.
김중현 회장이 기억을 더듬은 결과 ‘북한의 아들’ 노씨가 쓴 주소지는 97년 김 회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건넨 명함에 있는 것이었다. 당시 김 회장은 퀸즈 서니사이드에 대동면옥을 운영했고 이후 베이사이드와 맨해튼에 지점을 냈다. 그런데 2003년 서니사이드 본점이 화재로 소실됐고 이를 알 길 없는 노 씨는 12년간 고이 간직한 명함의 주소로 편지를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81년 뉴욕으로 이민온 김중현 회장은 한국전쟁중에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미국시민권을 따냈고 87년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이후 4차례 더 방문해서 사촌 및 외가 등 친척들은 찾을 수 있었지만 부모님과 4남매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북한의 노 씨를 만나게 된 것은 네번째 방북을 했던 97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을 잠시 방문했던 김 회장은 친구인 노상기 씨가 “우리 형님(노명기)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서 갔어요. 집안끼리도 가까워서 형님도 잘 아는 사이였는데 '혹시 평양에 가게 되면 우리 아들좀 찾아달라'고 해서 그해 11월 이북에서 수소문해서 만났어요. 나를 만나러 함경북도에서 일주일을 걸려서 왔지. 그때 내가 명함을 준거요”라고 설명했다.
꿈에도 그리던 아들의 소재를 알게 된 노명기 씨는 그해 이산가족 상봉단에 포함돼 평양에서 47년만에 아들과 감격의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후 노명기 씨는 미국에 사는 딸을 통해 북한의 아들과 10여년간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편지왕래가 끊기면서 노심초사하던 아들이 김 회장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김 회장은 10일 밤 부랴부랴 서울의 노명기 씨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서울의 노 씨도 뉴시스 보도를 통해 ‘북한의 아들’이 자신을 애타게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김 회장과 연락을 하려고 애 쓰던 중이었다.
김 회장은 “노명기 선생이 올해 아흔둘인데 정정합니다. 아들 걱정을 많이 하구 있어요. 알고보니 미국 사는 딸이 이사를 갔는데 그 소식이 아직 안간 모양이에요. 아들은 아버지가 연로한데 소식이 끊기니 너무 걱정을 한게지. 지금은 전화로 얘기했지만 나중에 직접 편지를 보여줄 생각”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북한의 아들은 김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녀동생과 편지거래가 끊어지고나니 아버님 생사여부도 알 수 없군요. 존경하는 아버님께서 생존하여 건강하신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담으로만 생각지 마시고 꼭 소식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2009년 새해 귀한 몸 부디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아버님께서 새해를 맞으며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 아들은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오래오래 장수하십시요”라고 애끓는 효심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