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하는 동경주 구석구석 오늘은 양남면 신대리 관문성에 찾아갑니다. 우리나라에도 장성(長城)이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만리장성에 비하자면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국가안전을 위한 국방의 중요한 유적으로 손꼽힙니다.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지금은 거의 흔적이 사라질 정도로 훼손돼 버렸지만 군데군데 원형이 남아 있어 그 소중함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에서 외동읍 녹동리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관문성이 바로 그것입니다.관문성은 경주시와 울산시의 경계를 두르고 있습니다. 신라 성덕왕 21년, 그러니까 772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아 신라의 도성인 서라벌을 지키기 위한 방어 전초기지로 쌓은 성입니다. 왜적이 신라를 침입하는 길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뉘었습니다. 한곳은 양산을 통한 육로를 선택했고 또 다른 하나는 울산을 이용한 바닷길을 이용했습니다. 양산에서 올라오는 왜적은 자연스럽게 높은 산들이 둘러싸여 방어가 쉬웠지만 울산 바닷길로 왜적이 침입하면 곧바로 도성으로 진입해 다급한 방어를 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울산 바닷길을 이용하는 왜적을 막을 성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이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됐던 연인원은 3만9262명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관문성의 총 길이는 6792보 5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약 12㎞ 정도입니다. 왕성이었던 반월성의 둘레가 1023보인 것에 비하면 관문성의 둘레는 반월성의 약 6배에 이릅니다.양남면 신대리의 관문성은 거의 훼손되고 남쪽과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는데 무너진 윗부분의 성벽을 후대에 잡석으로 보수해 마치 이중으로 두껍게 성을 쌓은 것 같이 보입니다. 서북쪽은 급경사지로 보수하지 않고 훼손된 상태로 방치돼 있습니다. 성안의 시설물로는 4대문의 터가 있고 현재의 남문지는 고려 또는 조선시대에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남문에서 동쪽 성벽 350m지점에 원형으로 남아 있는 수구(水口)가 있습니다.신대리의 관문성은 곧바로 기령을 넘어 모화리의 성곽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치달려 치술령 아랫마을인 외동읍 녹동리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관문성은 12㎞에 이를 정도로 길게 쌓다보니 도성 안의 명활산성 선도산성 등보다 산과 산을 잇는 특수한 축성방식이 도입돼야 했습니다.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공법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규모면에서 도성 안의 산성과 비교가 돼 ‘산리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중국의 문헌에도 관문성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나라의 기록인 ‘당서’의 ‘신라전’에 ‘산을 이어 수십리 좁은 골짜기를 쇠문으로 잠갔으니 관문이라 하며 항상 무기를 지닌 군사 수천 명이 지키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규모와 당시 국방의 엄중함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관문성은 사적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경주와 울산을 분명하게 가르는 심리적 경계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 경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최소한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와 울산의 도시적 위상을 가르는 유형의 장벽으로 존재했습니다.모화리와 녹동리의 관문성은 평지에 놓여 있어 산성으로서의 형태는 아니지만 양남면 신대리의 관문성은 산성의 형태를 잘 지니고 있습니다. 동경주의 주요 문화유적으로 제대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월성원자력홍보관에서 관문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동차로 마우나오션 골프장 주차장까지 가서 삼태봉 등산로를 따라 걸어야 합니다. 약 16㎞ 정도의 길을 따라 자동차로 이동해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올라가면 만납니다. 시간으로는 자동차로 마우나오션 골프장까지 약 30분, 산길로 걸어서 약 30분 소요됩니다.※ 이 콘텐츠는 ㈜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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